82년생 김지영, 9살부터 99살 여성들의 이야기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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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8.11.02 11:15

    그녀 이름은 표지

    그녀 이름은 |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76쪽 | 1만4500원

    조남주 작가는 『82년생 김지영』 출간 이후 “특별하지 않고 별일도 아니다”고 여겨져온 여성들의 삶을 “더 많이 드러내고 기록”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홉 살부터 일흔아홉 살까지 60여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는 2016년 12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경향신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제목의 르포 기사로 연재됐다. 그녀들이 ‘별일도 아닌데’라며 운을 뗀, 그러기에 작가가 더 경청한 저마다의 인생은 소설로 다시 쓰이고 28편의 이야기로 묶여 『그녀 이름은』으로 선보이게 됐다. 집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뉴스에서, 겪거나 목격했지만 ‘별일 아닌 일’로 스스로 삼켜버린 이야기들이 비로소 목소리를 찾은 것이다.

    『그녀 이름은』 속 28편의 이야기는 네 개의 장으로 묶였다. 부조리한 노동 환경 속에서 가족까지 부양해야 하는 2030 여성들, 결혼이라는 제도 중심과 언저리에서 고민하는 여성들, 제 이름도 잊은 채 가사ㆍ양육 노동이나 직장 노동 때론 둘 다를 오랜 시간 떠맡은 중년 이상의 여성들, 앞 세대 여성들의 어려움을 목도하면서도 ‘다시 만날 우리의 세계’를 꿈꾸는 10대ㆍ20대 여성들의 이야기가 각 장마다 눈물 또는 웃음 혹은 다짐이라는 서로 조금씩 다른 온기로 전달된다.

    “조용히 덮고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_ (「두 번째 사람」 중에서)

    「두 번째 사람」은 미투가 당사자에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 ‘소진’의 모습을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미투를 대하는 대중은 선정성에 집착하거나 피해자의 ‘순수성’을 의심한다. 자신의 선택을 “매일, 매 순간순간 후회”하면서도 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이기든 지든 이 싸움을 마무리해야겠다”라고 다짐하는 소진은 위태로운 듯 굳센 개인의 의지와 느슨한 듯 단단한 여성들의 연대감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이혼일기」와 「결혼일기」는 두 자매가 각각 이혼과 결혼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림으로써 정상적인 여자라면 ‘정상적인’ 결혼 제도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압력과 ‘바람직한’ 출산ㆍ양육ㆍ가사 부담에 내몰리며 직장에서는 입지를 위협받는 여성들의 부당한 부담을 서술한다. 「그녀들의 노후대책」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도 공식적인 ‘보호자’가 될 수 없는 동성 커플의 불안을 얘기한다.

    “똑같이 직장 다니는데 애 방학이라고 동분서주하는 것도, 나한테 미안해하고 신경 쓰는 것도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야.” (「진명 아빠에게」 중에서)

    남성들이 의무를 간과하는 사이 여성들에게만 전가되고 대물림되는 가사와 육아 노동의 고통, 한 번도 제대로 ‘나’의 이름을 찾지 못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진명 아빠에게」 속에서 덤덤히 들려온다. 남성 승객의 희롱 속에 버스를 몰며 생활을 이어가는 그녀의 이야기 「운전의 달인」, 직접고용을 쟁취해낸 국회 청소노동자 그녀의 이야기 「20년을 일했읍니다」는 중년 여성이 놓인 열악한 노동 환경을 환기하면서 ‘아줌마’가 아닌 노동자로서 그녀들의 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경찰은 ‘어이’ 소리에 맞춰 학생들을 밀어붙였다. 학생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져 서로의 위로 깔리고 엉켰다. 사방이 비명 소리였다. 그 사이로 제발 좀 꺼내달라는 다급한 목소리와 잠깐만 멈춰달라는 울먹이는 목소리들.” (「다시 만난 세계」 중에서)

    「다시 만난 세계」는 정권 퇴진 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이화여대 학생들의 시위가 품었던 희망과 열정을 기억해낸다. 무장한 채 학내에 투입된 경찰들에, 무소불위의 권력에 맞선 학생들의 막막함이 조남주 작가의 꼼꼼한 스케치로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생생하게 포착된다.

    소설을 마무리짓는 에필로그 격인 「78년생 J」는 조남주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왜 그녀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드러내고 기록”하고 싶었던 건지, 그 마음을 짐작케한다. 인습에 머무르지 않는 명민함과, 혐오에 휩쓸리지 않는 품위를 갖춘 『그녀 이름은』 은 가슴 한구석에 죄책감을 지닌, 어느새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된 조남주 작가가 “책임지는 어른”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기록해낸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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