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농익은 신비 '파묵칼레'

  • 트래블조선

입력 : 2018.07.19 07:00

    하얀 층을 이룬 테라스와 옥빛으로 테라스를 물들인 온천은 하늘 위에 지어진 여신들의 노천탕은 아니었을까. 파묵칼레의 신비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곳을 감싸고 있는 고대 도시의 수수께끼 같은 풍경이 더해지면, 비로소 신들이 그리던 도시의 디자인이 마무리된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 자연스럽게 응집된 문화적 독창성을 보여주는 곳 터키. 때문에 그들의 땅에 뿌려진 수많은 유산은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또 낯설기도 하다.

    첫 터키여행임에도 예상하지 못한 편안함을 어느 해외여행에서보다 빠르게 느낄 수 있었던 건, 오래도록 그들의공기를 함께 공유하며 축적해온 동양인들의 체취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낯설 수밖에 없었던 한 장면을 마주한 순간, 차근차근 심장의 표면에 엉겨 붙고 있던 야릇한 동질감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경, 파묵칼레. 마치 영화 속 E.T의 손가락이 나의 손가락에 닿은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파묵칼레

    데니즐리를 지나 파묵칼레로 가는 길은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라도 되는 듯 풍경을 순식간에 뒤바꿔 놓았다.

    자연 그대로의 차분함 속에서 묘한 긴장감마저 느끼게 하던 길이 얼마간 이어진 후, 뒤이어 나타난 새하얀 파묵칼레. 목화성이라는 그곳의 뜻처럼 목화꽃이 가득 피어난 라이스테라스 앞에서 작은 떨림과 함께 성스러운 기운이 온몸을 파고 들어온다.

    순백이 지닌 교과서적인 아름다움에 날것의 뽀송한 영혼을 불어넣은 것은 한낮의 태양을 머금고 더욱 아름답게 빛을 뿜어내는 옥빛 물결이다. ‘테라스풀Terrace Pool’이라는 표현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그물 속에 몸을 담글 수 없는 현실이 마냥 아쉽기만 한 자연 그대로의 건축물은 인간이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예술적 품격을 고루 갖췄다.

    어둡고 깊은 산 속 동굴에서나 감상할 수 있었던 기이한 형상의 종유석, 세계적인 불가사의 중 하나인 필리핀 바나우에에의 계단식 논이 하얗게 굳어버린 것만 같은 층층의 노천탕, 언덕 아래로 펼쳐진 고요한 목화밭지대와 작은 마을 그리고 하늘 위를 색색으로 수놓은 패러글라이딩을 탄 여행객의 환희까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 놓은 오랜 세월 축적된 파묵칼레의 신비는 하루 24시간에도 수 없이 그 모습을 바꿔간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해가 물러나는 시간까지 새하얀 목화성의 변신을 말없이 들여다보고만 싶은 곳. 이곳에 하루의 시간이 그 모습을 새기고 또 바꿔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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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tique Pool

    목화의 성

    터키의 3대 명소로 꼽히는 파묵칼레는 에게해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목화를 뜻하는 터키어 ‘파묵’과 성을 뜻하는 ’칼레’가 합쳐져 지어진 이름으로, 수많은 목화꽃이 만개해 높이가 1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성과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다.

    끊임없이 흐르는 뜨거운 온천수는 곳곳에 흩어진 웅덩이에 모이고, 이 물이 넘쳐 아래의 또 다른 웅덩이들로 흐른다. 이러한 반복된 과정을 통해 테라스와 종유석 등이 형성되어 왔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주변의 고대 도시인 히에라폴리스와 함께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겸한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파묵칼레가 하얀색을 띠는 이유

    파묵칼레의 언덕 위에서 발원된 뜨거운 온천수가 흘러 석회붕을 형성하는데, 온천이 표면으로 분출될 때 물에 함유되어 있는 탄화칼슘용액이 이산화탄소 및 탄화칼슘과 물로 분해된다.

    이때 이산화탄소는 공기 중으로 산화되고 탄화칼슘은 물에서 분리되어 흰색의 석회를 형성하게 된다.

    <파묵칼레 간단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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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묵칼레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도시 풍경

    - 가는 법
    에게해 내륙 멘데레스 계곡에 위치한 파묵칼레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관문 역할을 하는 도시 데니즐리로 가야 한다. 이스탄불 등에서데니즐리까지 항공편으로 연결 가능하며, 이스탄불과 데니즐리는 약 1시간 10분의 비행거리이다. 데니즐리에서 파묵칼레까지는 약 20km 떨어져 있으며, 터키의 대중교통 수단인 돌무쉬 또는 호텔 셔틀버스 등이 운행한다.

    - 패러글라이딩과 열기구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를 두 발로 걸으며 꼼꼼히 살피는 일반적인 여행 외에 특별하게 신비스러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패러글라이딩과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풍경을 즐기는 것. 날씨만 좋다면 언제나 고대도시와 하얀 목화성 위의 옥빛 노천탕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지만, 최고의 순간은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간이다. 파묵칼레의 일출은 카파도키아와 함께 터키 최고의 일출로 손꼽힌다. 인근 여행사 등을 통해 사전 예약이 가능하며 가격은 시즌에 따라 달라지고 호객을 하는 이들과 협상을 통해 가격을 조정하는 것이 좋다.

    물길을 따라 끊임없이 흐르는 온천수

    - 온천 즐기기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즐겼다는 파묵칼레의 온천. 과거 파묵칼레가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되기 이전에는 하얀 석회탕에서 몸을 담글 수 있었지만 이후로 금지되어 지금은 발을 담그고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따뜻한 온천수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하얀 석회암지대 뒤 언덕 쪽에 안티크 풀이 있다. 자연친화적인 모습의 수영장에서 온천을 즐기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다.

    - 목화성 산책은 맨발로
    하얀 석회암 지대에서는 반드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다녀야만 한다. 신발을 들고 다녀야 하는 점이 조금 불편하지만, 물속에 발을 담글수 있어 좋고, 석회암의 질감을 발로 느껴보는 것도 이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직원들이 어디선가 꼼꼼히 살피며 단속을 하고있다.


    히에라폴리스

    비잔틴 시대의 학자 스테파누스는 ‘신성한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 ‘히에라폴리스’ 라는 이름이 당시 고대 도시를 지키던 수많은 사원들로 인해 붙여졌다고 말했다.

    역사의 기억은 그렇지만 오늘 파묵칼레와 함께 히에라폴리스를 거닐고 있는 여행자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품는다. ‘온천이 샘솟고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진귀한 풍경을 품은 파묵칼레가 있기에 히에라폴리스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2천 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지만 당시의 사람들도 그 풍경을 음미하며 따뜻한 천연 온천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폐허나 다름없는 곳이지만 때문에 더욱 빛나는 풍경을 밟으며 가이드가 전하는 아주 먼과거의 이야기들을 듣는다. 가이드는 그 이야기들을 어디서 얻었을까. 지금껏 사라지지 않고 버텨온 이 도시의 모든 존재들이 그 답이다.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그렇지 못하던, 작은 돌덩이 하나 마저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생김새만 봐도 그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누군가 꼼꼼히 새겨 넣은 글자들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전한다. 고대 도시를 거닐며 알게된 히에라폴리스의 이야기들이 있어 파묵칼레 여행은 조금 더 풍성해진다.

    히에라폴리스의 간략 역사

    히에라폴리스의 역사는 무려 기원전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페르가뭄 왕조의 유메네스 2세가 도시를 최초로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족의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짓던 당시의 관례를 따라 페르가뭄 왕조의 창시자인 텔레포스의 부인 히에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기원전 129년경부터 로마에 귀속되며 본격적으로 역사서에 그 이름을 남기기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에는 양모 산업조합과 염색업, 직물업 카펫 제조업, 못 제조업, 구리 세공업 등과 관련된 내용들이 쓰여 있어 과거 이곳 사람들의 생활을 짐작게 한다.

    2세기와 3세기 히에라폴리스는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유대 사회의 등장과 함께 기독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후 12세기 십자군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히에라폴리스는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1219년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사람들이 떠나고 도시는 황폐화되어 더 이상 복구되지 못했다.

    <주요 볼거리들>

    히에라폴리스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최초 도시가 건설됐던 헬레니즘 시대의 것이 아닌 전부 로마시대의 유산들이다. 동서로 길게 직사각형 형태로 세워진 도시에는 아쉽게도 토대만 남아 있는 아폴로신전과 플루토니움, 기념 분수, 극장, 온천 수원지인 도미티안게이트, 승리의 문, 비잔틴게이트, 목욕탕, 우물, 교회, 무덤군인 네크로폴리스 그리고 사도 빌립의 교회이자 무덤 등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네크로폴리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고대 묘지이다. 무려 31만 평에 달하는 거대한 무덤군으로 다양한 형태를 띤 수천 개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석관 뚜껑에 새겨진 부조물을 통해 죽은 자가 어디서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석관 형태의 무덤, 몇 구의 시신이 함께 매장되어 가족의 묘로 추정되는 가옥형 무덤, 흙으로 덮는 매장실이 있는 고분 형태의 무덤 등으로 구분된다. 도시가 건설되기 이전부터 파묵칼레의 온천수는 질병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치유가 된 사람들은 다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갔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어떠했을까. 네크로폴리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 교회 목욕탕
    네크로폴리스를 지나 서쪽의 도시 성벽 방향으로 걷다 보면 도로 옆에 우뚝 선 건물이 보인다. 목욕탕이라는 사실이 쉽게 믿겨지지 않는 모습의 이 건물은 ‘교회 목욕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당당한 모습의 교회 목욕탕은 자재로 사용된 돌덩이의 거대함과 무게, 볼트식 지붕과 아치로 인해 로마 건축 양식의 강한 힘이 잘 느껴진다. 하지만 수차례의 지진 등으로 인해 상당 부분 파손되어 위태로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 도미티안게이트
    교회 목욕탕을 지나 동쪽으로 향하면 나타나는 기념문, 도미티안게이트.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이 문은 로마게이트, 당시 로마에서 파견된 아시아 총독의 이름을 딴 프론티우스게이트로 불리기도 하며, 문 상단에 새겨진 문구를 통해 1세기 후반에 도미티안 황제에 의해 세워졌음이 알려졌다.

    - 사도 빌립 기념 교회
    사도 빌립을 기념하기 위해 5세기 전반에 세운 기념교회로 도시 쪽의 신성한 계단을 통해 이곳에 갈 수 있다. 사도 빌립의 노력으로 기독교 사회와 기독교 초기 교회 중의 하나가 최초로 이곳에 세워졌으며, 사도 빌립이 80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에이 교회 어딘가에 묻힌 것으로 추측된다.

    - 고대 극장
    히에라폴리스 유적의 하이라이트. 약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비교적 소규모의 고대 원형극장이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대리석 부조물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언덕에 세워진 이 극장의 둥근 볼트형 지붕과 아치 등은 고대 로마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띠고 있으며, 무대 건물 정면에는 인공적이면서 예술적 아름다움이 뛰어난 부조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이 부조물들은 아폴로 신과 연관된 신화를 주제로 만들어졌으며, 굴껍질 모양의 수많은 장식은 아프로디테와 관련된 신화 속 모습과 닮았다. 현대의 무대보다 음향효과가 더욱 뛰어날 정도로 훌륭한 무대를 갖추고 있어 현재도 공연이 이곳에서 열리고 있으며, 많은 예술가들이 무대에 오르길 꿈꾸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 파묵칼레 박물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2세기에 로마 목욕탕으로 지어졌다.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난 건물로 로마 건축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현재 유물 진열실로 사용 중인 목욕탕은 3개의 공간인 열탕이 있는 칼다리움, 온실인 테피다리움, 냉실이 프리지다리움으로 구성되었다. 박물관 내에는 히에라폴리스에서 발굴된 유적들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당시의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게 한다.


    라오디게아

    "히에라폴리스와 파묵칼레의 하얀 목화성의 모습이 멀리 조그맣게 보인다. 비록 지금은 라오디게아의 영화롭던 모습은 사라지고 폐허만이 남아 있지만, 한때 히에라폴리스는 라오디게아의 시민들에게 작은 이웃도시였을 것이다."

    파묵칼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찾은 라오디게아를 돌아보다가 멀리 모습을 드러낸 파묵칼레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떠오른 생각은 고대 도시 간의 경쟁과 전쟁 같은 것들이었다.

    영화 &lt;글래디에이터&gt; 속에서나 볼수 있었던 검투사들의 거친 혈투와 이웃 국가 또는 도시 간의 정복 전쟁. 육안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었던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게아 두 도시는 과연 어떤 관계였을까. 그리고 또 어떻게 공존하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까. 폐허나 다름 없음에도 라오디게아에 남은 몇 가지 유적들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하나씩 내어놓는다.

    고대의 가장 중요한 교회

    라오디게아는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7개의 교회 중 하나가 있던 곳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 관구가 있던 곳으로 당시 중요한 종교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라딕’이라고 불리던 이곳 주민들의 수는 히에라폴리스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는 히에라폴리스의 것보다 규모가 더 큰 원형 극장이 2개나 되기 때문.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꼽히는 것은 길이 355미터, 높이 65미터에 달하는 스타디움이다. 주민들이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좌석에 있던 대리석들을 모두 가져가 버렸음에도 현재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본래의 거대한 규모와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라오디게아의 간략 역사

    현재 남아 있는 도시는 기원전 3세기 초반 안티오쿠스2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왕의 부인인 라오디게아의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지었다.

    당시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으로 기원전 2세기에 페르가뭄 왕국의지배를 받다가 이후 인근의 히에라폴리스 등의 고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기원전 60년 강력한 지진으로 도시가 많이 파괴된 이후, 2세기 초 로마 황제 하드리안이 이곳을 방문하며 다시 활력을 되찾아 완전히 재건설되었다. 하지만 5세기 말에대지진으로 도시는 다시 파괴되었고, 인근의 데니즐리의 성장에 따라 주민들이 데니즐리로 이주하면서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 editor+PHOTO 김관수
    · 기사 제공 : 여행매거진 G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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