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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벚꽃 향 나는 사케… 강건한 초록을 품은 털게의 봄맛

  •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입력 : 2018.05.18 04:00

    [정동현의 지금은 먹고 그때는 먹었다] 문씨네 일식 선술집 '분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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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반포동 일식 선술집 '분노지'의 털게찜. 먹기 좋게 발라져서 나온 털게 살을 게 내장으로 만든 소스에 찍어 먹는다. /정동현
    격자무늬로 짜인 서울 강남은 똑같은 폭과 모양의 도로, 빌딩 덕분에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도 쉽지 않다. 경부고속도로가 큰 강처럼 동과 서를 나누고 큰 산처럼 아파트가 그 사이에 빼곡히 들어찬 이 동네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영업을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의 이름은 분노지(文ノ字). 풀이하면 '문씨네 가게'다.

    이른 저녁이었고 분식집과 치킨집이 자리한 아파트로 향하는 너저분한 골목길이었다. 학생 몇몇이 구부정한 어깨로 휴대폰을 보며 길을 걸었다. 학원으로 향하는 그들의 가방이 옛 보부상의 봇짐처럼 무거워 보였다. 그 옆, 작은 가게 앞에 매달린 포렴이 가볍게 휘날렸다. 포렴 아래 작은 의자에 큰 덩치의 남자가 흰 조리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어깨가 딱 벌어졌으며 눈이 부리부리했다. 다시 말해 쉽게 말 붙이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그가 바로 가게의 주인장 '문씨'였다.

    "저기…."

    나는 예약했다고 말하는 대신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그가 나를 바라보며 동물원의 곰처럼 씩 웃었다.

    "예약하신 분이죠? 이쪽으로 오시죠."

    가게에는 채 열 개가 되지 않는 바 좌석과 4인석 네 개 남짓이 전부였다. 일하는 사람은 주인장과 종업원 딱 둘이었다. 내가 자리를 잡자마자 또 다른 남자 하나가 슬그머니 바 끝에 앉았다. 그는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문고판 한 권을 꺼내 들더니 이따금 내려온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올리며 책을 읽어나갔다.

    나도 질세라 메뉴판을 펼쳤다. 고정으로 나가는 메뉴 한 장, 매번 바뀌는 계절 메뉴 한 장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일본 사케가 몇 페이지에 걸쳐 있었다. 일본에서 요리를 배웠다는 주인장의 이력이 떠올랐다.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사이 일행이 도착했다.

    늦봄이지만 봄이었다. 두릅 튀김은 봄의 끝자락과 아쉽게 이별하는 표지였다. 튀김옷을 얇게 입혀 바싹, 그러나 가볍게 튀겨낸 기술이 돋보였다. 한입 베면 바삭했고 조금 더 턱에 힘을 주면 두릅의 푸른 향이 슬그머니 입속에 번졌다. 아보카도 구이는 간장과 어우러져 이국적이면서도 익숙한 맛을 냈다. 버터와 비슷한 맛이지만 식물성 기름의 가벼운 느낌에 간장을 뿌리니 옛날 버터 밥을 먹는 듯했다.

    이왕에 기름지게 시작을 했으니 끝을 보고 싶어졌다. 메로 구이와 새우튀김, 아나고튀김, 닭튀김(가라아게)을 한 번에 시켰다. 주문을 전해 들은 주인장이 카운터 너머로 우리를 슬쩍 훔쳐봤다.

    외국에서 이빨생선(toothfish)라고 부르는 메로는 심해(深海) 생선으로 주로 미국에서 소비된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수출이 되지 않는 자투리 살만 겨우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집의 메로는 살이 도톰해서 거의 한 뼘에 가까웠다. 짭짤하고 달달한 양념에 기름인 메로 살이 크림처럼 녹아들었다.

    새우튀김과 아나고튀김은 고소한 맛이 과하지 않았고 오래 튀겼을 때 생기는 질긴 식감이 없었다. 닭튀김은 간장 양념에 미리 재워놓았는지 간이 촉촉하게 되어 있어 복숭아를 베어 먹는 듯 육즙이 흘러나왔다. 중간중간 주인장이 추천해준 사케는 벚꽃을 닮은 향을 냈다. 신경질적인 맛을 내는 와인과 달리 사케는 그 맛이 나긋하고 잔잔했다.

    끝으로 이 집 대표 메뉴라는 돼지고기찜샤브와 시가(時價)로 값을 받는 털게찜이 나왔다. 앞선 튀김과 달리 쪄서 담백한 맛이 극대화된 돼지고기와 두릅, 버섯, 배추를 연한 간장에 찍어 먹었다. 주인장이 일일이 살을 발라낸 털게를 내장소스에 푹 담갔다 입에 넣었다. 연하고 담담하지만 그 속에 강건한 초록을 품은 봄의 맛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 맛에는 이름이 있었고 그 이름에는 자부심이 있었다. 누군가의 뒤에 숨지 않는 당당한 이 작은 가게는 늦게까지 불을 끄지 않고 손님을 받았다. 그 밤 내내 곰 같은 주인장은 큰 손으로 요리하며 공손히 말했다.

    #분노지: 돼지고기찜샤브 2만5000원, 닭튀김 1만6000원, 메로구이 2만원. 서울 반포동, 070-4105-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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