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채식남녀, 두부버거를 썰다

채식주의가 한국인의 생활 속에 파고들고 있다. 채식만 고수하는 사람부터 국물은 먹되 고깃덩어리는 먹지 않는 '비덩주의'까지 잠재적 채식주의자도 늘고 있다.
단순히 식습관뿐 아니라 소비와 생활 전반까지 확대된 '비거니즘' '비건 라이프'도 확산하고 있다. 한국도 이제 그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입력 : 2018.05.18 04:00

    [cover story]
    환경·동물보호 관심에 2030 채식주의 붐… 비건 버거·베이커리 등 메뉴도 다양
    과일·채소만 먹는 '비건', 해산물까지 먹는 '페스코'… 젊은 식탁 파고든 별별 채식
    국내 채식주의자 5년새 2배 이상 증가… 이효리·유지태 등 연예인 채식선언도 한몫

    "오늘 점심 햄버거 어때?"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점심 메뉴를 제안한 서 과장은 분명 지난달 채식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육즙 가득한 고기 패티에 마요네즈 가득한 햄버거라니!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살아가기란 녹록지 않다며 한숨 쉬던 그가 결국엔 백기를 들었구나 싶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햄버거 하면 육즙 가득한 고기 패티가 떠오르는가. 그런 고정관념은 이제 거둬들여야겠다. 고기 한 점 없는 채식주의자용 버거가 요즘 유행이다. 사진은 서울 성수동 ‘더피커’의 비건 베이컨 버거. 두부로 만든 패티에 두유로 만든 마요네즈가 들었다. / 최항석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서 과장이 회사 동료를 이끌고 향한 곳은 서울 성수동 '더피커'. 친환경 식재료로 건강식을 만드는 그로서런트(grocerant·식품점을 겸한 레스토랑)다. "여기 '비건(vegan·채소와 과일만 섭취하는 엄격한 채식 유형) 베이컨 버거' 한번 먹어 봐." 고기 없는 햄버거가 어디 햄버거란 말인가. 고기 없음 못 산다는 '고기 러버'들의 동공이 말없이 흔들렸다. 잠시 뒤 등장한 비건 버거는 겉보기엔 일반 햄버거와 별 차이가 없다. 비밀은 두부를 눌러 만든 패티와 동물의 젖인 우유 대신 콩으로 만든 두유 마요네즈다. 두부 패티에서 묘하게 베이컨 맛이 났다.

    채식주의가 한국인의 생활 속에 파고들고 있다. 엄격하게 채식만 고수하는 사람부터 국물 요리가 많은 한식 특성상 국물은 먹되 고깃덩어리는 먹지 않는 '비덩주의'까지 잠재적 채식주의자도 늘고 있다. 세분화된 채식주의자(베지테리언·vegetarian) 개념도 속속 유입되는 중. 채소와 과일만 섭취하는 비건(vegan), 떨어진 열매만 먹는 프루테리언(fruitarian), 달걀은 먹는 오보(ovo), 유제품은 먹는 락토(lacto), 해산물까지 먹는 페스코(pesco) 등 다양한 채식 유형이 소개되고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지난해 7000여명이 몰린 ‘비건페스티벌’. / 비건페스티벌코리아

    한국채식연합 이원복 대표는 "국내 채식주의자 인구는 전체 인구의 2%로 추산되는데 5년 새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라며 "베지테리언 음식점도 300여 곳에 이른다"고 했다. 오는 26일 서울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서 개최되는 '제5회 비건 페스티벌'에는 1만명 이상이 모일 것으로 예상된다. 2016년 5월 처음 열린 비건 페스티벌엔 1500명이 다녀갔고 지난해 열린 4회 행사엔 7000명이 몰렸다. 행사를 기획한 양윤아(36) 비건타이거 대표는 "채식하는 친구들끼리 여러 사람에게 채식을 알리자는 취지로 페스티벌을 기획했는데 첫 행사에 예상했던 인원의 10배가 모였다"며 "최근 들어 채식 인구가 급증하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했다.

    채식 찾는 이들 많아지니 채식 파는 곳도, 메뉴도 다양해지고 있다. 채식 전문점이 속속 생겨나고, 스타벅스와 스무디킹 등 비건 베이커리를 판매하는 프랜차이즈들도 있다. 수제 맥주 브루어리 '맥파이브루잉'에선 비건 맥주를 만든다.

    와인 감별사인 소믈리에처럼 채소 전문가인 '채소 소믈리에'라는 직업도 생겼다. 채소 소믈리에인 홍성란 요리연구가는 "한때는 생소하기만 했던 아보카도, 아스파라거스, 퀴노아 등 낯선 채소와 수퍼푸드가 많아지면서 채식용 식재료의 폭이 넓어졌고 채소 전문가도 늘고 있다"고 했다. 채식주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유튜버나 소셜미디어, 채식 모임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치맥'과 삼겹살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한국인의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

    ※위로 갈수록 엄격한 채식주의.
    ※위로 갈수록 엄격한 채식주의.

    별별(別別) 채식

    세계채식연맹(IVU)에 따르면 전 세계 채식 인구는 1억8000만명에 달한다. 건강, 다이어트, 종교, 동물의 권리와 환경 문제 등 채식하는 이유도 다양하다. 채식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채식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자 '채소(vegetable)'와 '경제(economics)'를 합친 '베지노믹스(vegenomics·채소 경제학)'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단순히 식습관뿐 아니라 소비와 생활 전반까지 확대된 '비거니즘' '비건 라이프'도 확산하고 있다. 한국도 이제 그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한국채식연합 이원복 대표는 "국내에 채식주의자란 말이 나오고 사회적인 운동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후반"이라며 "하이텔, 나우누리 등 PC 통신이 발달하면서 채식의 유익함을 공유하는 동호회가 생겨나고 공감대를 넓히기 위한 캠페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건강식이라는 관점이 강했다.

    채식주의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늘어난 배경은 환경과 동물의 권리, 윤리적 소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20~30대를 중심으로 건강 등 실용적인 이유에서 하는 채식보다 '윤리적 채식'을 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고 했다.

    채식이 문화로 확산하는 데는 인기 연예인들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도 있다. '채식한끼' 운영자 박상진씨는 "채식에 대한 인식이 결정적으로 바뀐 건 가수 이효리의 채식 선언이었다"고 했다. 락토오보(계란과 우유를 먹는) 채식을 하는 디자이너 이시영(26)씨는 "배우 유지태·김효진 부부가 락토오보 채식을 하고 있고, 배우 임수정이 비건(과일 채소만 먹는 유형), 가수 이효리와 배우 이하늬가 페스코(해산물까지 먹는) 채식을 하는 게 알려져 채식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했다.

    내가 채식을 하는 이유?

    올 2월 개봉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엔 총 16가지의 음식이 등장한다. 주인공 혜원(김태리)은 엄마와 고향집의 추억이 담긴 음식을 요리하고 먹으며 깊은 위로를 받는다. 눈밭에 파묻힌 배추 밑동으로 끓인 배춧국과 김치수제비, 밤조림과 꽃파스타…. 재밌는 건 16가지의 음식 중 고기가 들어간 메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임순례(58) 감독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다.

    이미지 크게보기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 혜원이 꽃 파스타를 먹는 장면.
    임 감독은 2003년부터 채식을 했다. "친한 PD가 잃어버린 반려견을 찾으려다 경동시장 개소주 골목에 들어갔는데 그때 철창에 갇힌 개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반려견을 키우는 입장에서 우리 개를 잃어버리면 누군가의 식탁에 오를 수도 있다 생각하니 아찔했어요. 그때부터 회식 자리에서 더 이상 삼겹살이 입으로 들어가지 않더군요."

    임 감독은 동물 보호 시민단체 '카라'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최근엔 페스코 채식을 하고 있다. 고추, 가지, 오이, 옥수수 등 채소는 텃밭에서 직접 길러 먹는다. 그는 "유기농이니 친환경이니 채소는 꼼꼼히 따지면서도 고기가 어떻게 길러지고 도축되는지 모르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많다"며 "육식도 따지다 보면 생활 패턴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채식 블로거 이지은씨가 블로그에 올린 ‘비건채식일기’(왼쪽)와 비건 채식 일기를 연재하는 블로거 이지은씨가 직접 만든 식사 메뉴. / 이지은

    다양한 채식 유형만큼이나 채식을 결심하는 이유도 많다. 블로그에 '100일간의 비건채식일기'(blog.naver.com/iu0413)를 쓰고 있는 직장인 이지은(26)씨가 비건 채식을 결심한 이유는 조금 색다르다. 체대를 졸업하고 스포츠 계통에서 일하면서 육류를 먹지 않으면 힘을 못 쓴다, 단백질이 부족하다, 근육량이 줄어든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뒷받침하는 자료가 부족했다. '비건 채식을 하면 근육량을 유지하지 못할까?' 하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직접 100일간 체험에 도전했다.

    채식, 유행으로 소비하다

    소셜미디어 등에도 채식 관련 콘텐츠가 많아졌다. 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에 재학 중인 지하얀(22)·서다래(22)씨는 '비건'을 주제로 다양한 맛집과 제품, 고민 해결해주는 유튜브 채널 '하다튜브(hadatube)'를 운영하고 있다. 다이어트를 하다 비건 음식을 알게 된 두 친구는 동물권과 환경 문제에 관심이 커져 영상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지난해 11월 개설한 채널의 구독자는 2만6000명이 넘었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 다이어트에 관심 많은 여성의 반응이 뜨겁다. 두 사람은 "비건이라고 하면 같이 밥 먹길 꺼리거나 채식도 편식이라며 핀잔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관심이 급격히 커지며 달라진 반응을 느낀다"고 했다.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채식 한 끼를 함께하는 커뮤니티도 활발하다. '채식한끼(인스타그램@go.greenfeed)'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채식 관련한 최신 정보를 공유하고 매주 1회 오프라인 모임을 열고 있다. 13년째 채식을 하며 비건을 지향하는 커뮤니티 운영자 박상진씨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도 채식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며 "특히 20대 초반~30대 초반의 반응이 뜨겁다"고 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채식을 한 끼 하며 정보를 나누는 커뮤니티 ‘채식한끼’. / 채식한끼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김용섭 소장은 20~30대를 중심으로 채식이 트렌드로 떠오른 이유로 "밀레니얼 세대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채식이 의식 있는 행위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며 "기성세대에 비해 식습관을 바꾸기 쉬운 것도 한 요인"이라고 했다. 그는 "소수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적 변화도 채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

    남의 이목을 염두에 둔 행위라는 시각도 있다. 대학생 주이영(22)씨는 "주위에 채식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늘었지만 유행을 좇듯 따라 하는 건 채식의 본질을 해치는 것 같다"며 "채식을 안 하면 윤리적이지 않다는 시선으로 보고 자기만 개념 있는 척하는 건 불편하다"고 했다.

    똑똑하게 채식하려면

    "처음부터 모든 고기를 끊어버리면 실패 확률이 높아져요. 고기의 종류를 줄이거나 또는 양을 줄이는 방법으로 점차 끊어나가는 게 쉬워요." 임순례 감독이 채식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하는 조언이다. 미국에서 시작돼 폴 매카트니도 참여하는 '고기 없는 월요일(Meat Free Monday)' 캠페인처럼 일주일에 하루, 하루에 한 끼 육식을 하지 않는 것도 채식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고기를 뺀 식단인 만큼 영양소가 부족하지 않도록 더욱 신경 써야 한다. 한국채식영양연구소 이광조 박사('채식치유학' 저자)는 채식 식단에선 3가지를 꼭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는 통곡류입니다. 현미나 통밀은 탄수화물의 공급원이 됩니다. 둘째 콩류와 견과류, 종실류예요. 단백질과 필수지방산을 함께 공급해주거든요. 셋째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 해조류로 수용성비타민을 보충해 줍니다."

    채소를 잘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채소 소믈리에 홍성란씨는 "꼭 제철 채소를 먹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때 다 먹지 못한다면 살짝 데친 후 얼려서 보관해 필요할 때 꺼내 먹는 것도 하나의 팁. 자투리 채소는 물에 우려서 차로 마시면 미네랄을 섭취할 수 있다.

    비싼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해서 식비가 줄진 않는다. 채식을 실천하는 대학생 박수영(23)씨는 "가장 힘든 건 밖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정적이다 보니 집에서 챙겨 먹거나 따로 도시락을 챙겨 다녔는데 정말 부지런해야 한다"며 "장도 자주 봐야 하고 평소에 먹지 않던 채소나 견과류, 비건 식품도 챙기니 비용도 많이 든다"고 했다.

    [관련 기사] 알록달록 '채소폭탄'… 채식 좀 해 본 사람들의 추천 맛집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