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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매력… 맛있고, 재밌고, 멋있다

천덕꾸러기였던 '못생김'이 요즘 주목받고 있다. 멋지고 정돈되고 섹시한 이미지에 질린 이들이 비록 외모는 못났을지라도 진정성 있는 것들을 찾아나서고 있다.
음식·패션·음악·광고·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서 '어글리(ugly·못생긴)'가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못생겨서 자랑스러운 '어글리 세상'이 오고 있다.

    입력 : 2018.04.13 04:00

    [cover story]
    못난이 과일·채소 인기, 런웨이에 '배 바지' … 음식·패션·음악·광고 '어글리 전성시대'
    "너도 못났니, 나도 못났다"… 강요된 완벽함에 지친 사람들의 열광
    "어글리는 숨겨진 아름다움"… 화려한 외형에서 벗어나 본질로 돌아와

    뿔 난 토마토, 혹 난 파프리카, 두 개가 붙은 감자…. 달리 생겼을 뿐인데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진열대에 '입성'하지 못했다. 패션계에선 유행에 뒤처져도, 시대를 너무 앞서가도 '어글리(ugly)'란 혹평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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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어진 호박과 오이, 혹이 나고 움푹 팬 파프리카…. 못생겼다는 이유로 가게에서 퇴짜 맞았던 채소들이 당당하게 빛을 보는 시대가 됐다. “못났으면 어때? 맛있고 영양 많고 신선하면 그만이지”라며 파는 이도, 사는 이도 늘고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런데 천덕꾸러기였던 '못생김'이 요즘 주목받고 있다. 멋지고 정돈되고 섹시한 이미지에 질린 이들이 비록 외모는 못났을지라도 진정성 있는 것들을 찾아나서고 있다. 음식·패션·음악·광고·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서 '어글리(ugly·못생긴)'가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못생겼으면 어때? 맛있고 영양 많고 신선하면 그만이지"라며 '못난이' 과일과 채소를 파는 이도, 사는 이도 늘고 있다. 겉모습은 투박하지만 속이 꽉 찬 빵을 파는 빵집에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선다. 넷플릭스는 최근 음식 다큐멘터리 '어글리 딜리셔스(Ugly Delicious)'를 내놨다. 사진발 잘 받는 화려하고 멋진 음식이 아닌, 김치찌개·만두·피자 등 세계 각국 평범한 사람들이 먹는 소박한 음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방송을 기획·진행한 한국계 미국인 스타 셰프 데이비드 장(41·한국명 장석호)은 "우리에게 진짜 소중하고 귀한 음식은 어글리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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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글리 시크’의 대표주자인 발렌시아가 2018봄여름 컬렉션. ‘주말 산책룩’이란 콘셉트로 아웃도어 의상을 양복바지에 우겨넣고 배 바지처럼 끌어올렸다. / 발렌시아가

    패션에서는 전통적인 관점에선 대척점에 있는 두 단어 '추함(ugly)'과 '세련됨(chic)'이 합쳐진 '어글리 시크(ugly chic)'가 유행의 첫머리에 있다. 럭셔리 브랜드 메종마르지엘라의 2018 가을·겨울 컬렉션에선 양봉업자처럼 얼굴을 망사로 덮어쓴 패션을 선보였고, 구찌는 '배 바지'같이 높은 허리에 대충 찬 전대 스타일에서부터 아버지 옷장 구석을 뒤져서 꺼내 겹쳐 입은 듯한 의상을 선보이며 최근 2~3년 사이 가장 뜨는 브랜드가 됐다. 멍청하고 따분한 공부벌레나 괴짜 같은 모델들이 쇼 무대를 누비기도 한다. 못생김을 '쿨(cool·멋진)'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과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한 '황금 비율'이 여전히 미적 기준의 바이블처럼 신봉되고는 있지만 아름다움이란 단어의 정형화된 형태를 누가 정하냐는 반발도 적지 않다. '못생김 전성시대'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디자이너인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어글리는 숨겨진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세상의 못난 부분에 대해 과감하게 드러내는 데서 예술성이 결정된다는 해석이다. 못생겨서 죄송하다? 더는 아니다. 못생겨도 당당한, 아니 못생겨서 자랑스러운 '어글리 세상'이 오고 있다.


    쓰레기통에서 구출된 못난이 음식

    ‘부끄러운 과일 & 채소’ 캠페인 포스터. “못생긴 당근? 수프에 들어가면 누가 신경 쓰나”라고 적혔다. 캠페인은 멀쩡한 채소와 과일이 단지 유통업체 규격에 맞지 않는단 이유로 버려지는 문제를 환기시켰다. / 인터넷 캡처
    ‘부끄러운 과일 & 채소’ 캠페인 포스터. “못생긴 당근? 수프에 들어가면 누가 신경 쓰나”라고 적혔다. 캠페인은 멀쩡한 채소와 과일이 단지 유통업체 규격에 맞지 않는단 이유로 버려지는 문제를 환기시켰다. / 인터넷 캡처
    '프레시어글리(Fresh Ugly)'는 유통업체에서 받아주지 않는 파프리카·토마토·사과·고구마를 30~50% 저렴하게 판매하는 '못난이 농산물 쇼핑 플랫폼'이다. 휘어진 오이, 뿔 난 파프리카 등 일반 잣대로는 기형(畸形)으로 분류되는 '못난이' 과일·채소들만 판다. 대표 박성호(41)씨는 백화점 과일 담당 바이어 출신으로 유럽 출장길에 '부끄러운 과일 & 채소(Inglorious Fruits & Vegetables)' 캠페인 포스터를 우연히 보고 지난해 창업했다. 조만간 부서진 다시마, 자투리 미역까지 제품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부끄러운 과일 & 채소' 캠페인은 프랑스 대형 수퍼마켓 체인 '인테르마르셰(Intermarche)'가 2014년 시작한 캠페인. 유럽연합국가에서 매년 3억t의 과채류가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버려진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못생긴 당근? 수프에 들어가면 누가 신경 쓰나(Ugly carrot. In a soup who cares)?" 같은 문구의 포스터를 뿌려 반향을 일으켰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품 중 25~ 33%가 버려지고, 이 중 44%가 과채류다. 맛이 없거나, 영양이 부족하거나, 신선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유통업체가 원하는 규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어글리'하단 이유에서다. 한 대형 마트 채소 전문 바이어는 "생산자들은 과잉생산한 농수산물 중 유통업체 기준에 맞는 것만 골라내고 나머지는 폐기한다"며 "폐기된 농수산물 생산 비용은 정부 보조금으로 메우거나 소비자에게 전가한다"고 했다. 못난이 채소의 소비는 윤리적 소비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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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난이 농산물 쇼핑 플랫폼 ‘프레시어글리’에서 판매하는 토마토와 파프리카, 가지. 맛과 영양은 같으면서 가격은 일반 마트보다 30~50% 저렴해 인기다. 서울 망원동 ‘어글리 베이커리’의 트리플 치즈 사워도우 빵과 얼그레이 스콘. / 이경호·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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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글리 베이커리’ 단호박 사워도우 빵. 단호박과 크림치즈 등 속이 워낙 많아 모양이 예쁘게 나오기 힘들 정도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망원동 '어글리 베이커리'는 요즘 떠오르는 빵집이다. 가게가 워낙 작긴 하지만, 주말이면 1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입장할 수 있다. 이 집 빵들은 예쁜 것과는 거리가 있다. 각양각색, 전부 모양이 다르고 우락부락하다. "모양이 좋고 일정하게 나오도록 해주는 제빵개량제(첨가물의 일종)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넣고 싶지는 않았어요. 빵 모양이 다 다르게 나오는 거, 어쩌면 그게 자연스럽잖아요?" 정정훈(33) 대표는 "우리 빵은 겉보다 속이 예쁘다"며 웃었다.

    일부러 허술하게 찍는다?

    마케팅이 이 흐름을 놓칠 리 없다. 미국 경제 뉴스 사이트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에 따르면 맥도날드는 2016년부터 음식을 '못생기게(ugly)' 보이도록 애쓴다고 한다. 깔끔하고 좌우대칭이 완벽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지저분하고 불완전한 음식 사진과 영상을 광고에 쓴다. 한국 맥도날드 관계자는 "최근 메뉴 사진을 보면 햄버거가 약간 어그러져 있고, 양상추가 떨어져 있기도 하다"며 "예전 같으면 상상하지 못할 모습"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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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도날드 ‘시그니처 버거’ 광고 사진. 소스가 흘러내리고 바닥에 떨어진 양상추를 그대로 두는 등, 맥도날드 광고·홍보 이미지가 과거보다 훨씬 ‘어글리’ 해졌다. / 한국 맥도날드

    광고업계에서는 음식 광고가 '어글리'로 돌아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 광고대행사 JWT는 2014년 내놓은 광고 트렌드 전망 리포트에서 "엉뚱하고, 지저분하고, 결함이 있는 불완전함 심지어 노골적인 볼품없음(ugliness)이 깔끔하게 다듬어지고 큐레이션(curated)된 세상에서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비주얼 피로 사회, 외모보다 본질

    전문가들은 못생김이 화두로 부상한 것은 '비주얼 사회'에 대한 피로감이라고 분석한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시각적으로 예쁘고 멋지고 화려한 것들 투성이다. 요리사도, 먹는 사람도, 맛있는 음식 만들기보다 예쁘게 보이는 음식 만들기에 열 올린다. '푸드 포르노(food pornography)'란 냉소 섞인 단어도 쓰인다. 푸드 포르노는 1984년 미국 여성학자 로잘린 카워드(Coward)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성행위를 자극적으로 보여주는 포르노처럼 음식을 시각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찍은 사진과 영상을 일컫는다. 이런 외형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본질로 돌아가자는 자성이 '어글리' 현상을 이끈다는 얘기다.

    브랜드 컨설팅사 기획흥신소 서대웅 소장은 "포토샵으로 완벽하게 매만진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어글리'에서 진정성을 찾는 것 같다"며 지난해 페이스북에서 화제를 모은 충주시청 조남식 주무관이 만든 '옥수수 홍보' 얘기를 꺼냈다. 컴퓨터에 익숙지 않은 주무관이 포토샵을 직접 배워 어찌 보면 서툴고 우스꽝스럽게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그 점 때문에 오히려 인기를 끌었다. "자기 지역 특산물에 대한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포스팅"이란 호평과 함께 방문객이 100만명을 넘겼다. 매끈하지 않아 오히려 흡인력이 있다는 호평이 줄을 이었다. 서 소장은 "TV도, 소셜 미디어도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양산하고 있는데 이럴수록 사람들은 잘 꾸민 것에 지루함과 부담감을 느낀다"며 "못난 것이 오히려 자기 콘텐츠가 되는 사회가 온 것"이라고 했다. '장맛보다 뚝배기'로 가던 세상이 다시 '뚝배기보다 장맛'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황부영 브랜다임앤파트너즈 대표는 "마케팅 분야에서 5~6년 전 플로섬(flawsome·결점) 마케팅이 일부 소비자를 통해 호응을 얻은 이후 문화계 전반적으로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 힘을 얻고 있다"며 "강요된 완벽함 속에 지친 현대인들이 자신의 결점을 속 시원히 내놓으면서 '너도 못났니 나도 못났다'라는 식으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고 했다.

    주근깨 있고 머리 큰 '못난이' 캐릭터로 인기 끄는 디자인문구 브랜드 '오롤리데이' 대표 박신후(32)씨가 말했다. "완벽하고 예쁘지만 매력 없는 사람도 많아요. 완벽해야 살아남을 것만 같은 시대에 완벽해 보이지 않아서 못난이에게 더 눈이 가는 게 아닐까요? 어딘가 애처로운 나랑 닮은 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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