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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놓고 기억하는 삶… 시간에 지지 않는 비법"

작년 4월 몽블랑 인터내셔널은 바레츠키를 새 CEO로 임명했다. 할아버지 만년필을 받고 기뻐하던 한 소년이 38년이 흘러 세계적 만년필 회사의 새 수장이 됐다.
미국 뉴욕에서 바레츠키는 생텍쥐페리의 책 '어린 왕자'와 만년필 한 자루를 테이블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는 "삶에는 우연이라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입력 : 2018.04.13 04:00

    바레츠키 몽블랑 CEO '르 쁘띠 프린스' 펜 공개

    니콜라 바레츠키(Baretzki·48)는 열 살에 할아버지로부터 낡지만 깨끗한 몽블랑 만년필 한 자루를 물려받았다. 어린 눈에도 근사한 펜이었다. 새하얀 종이 위에 글씨를 쓰면 잉크 번지는 느낌이나 촉 굴러가는 감촉이 이전에 알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잃어버릴까 걱정돼서 학교에 차마 가져갈 순 없었어요. 부모님이 대신 보관해주셨어요. 스무 살 되고 프랑스 파리 비즈니스 스쿨에 들어가게 됐을 때는 용돈을 모아 새 만년필을 하나 더 샀고요. 내게 주는 선물이었어요. 내 삶에 새 페이지가 펼쳐졌으니 새로운 펜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거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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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 바레츠키는 한국을 무척 좋아한다. 그는 “취향 좋고 일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첨단의 도시와 이채로운 음식도 있다. 내겐 참으로 역동적이고 매력 넘치는 곳”이라고 했다./몽블랑

    작년 4월 몽블랑 인터내셔널(Montblanc International)은 바레츠키를 새 CEO로 임명했다. 할아버지 만년필을 받고 기뻐하던 그 소년이 38년이 흘러 세계적 만년필 회사의 새 수장이 됐다. 지난 4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한 호텔에서 바레츠키는 프랑스 소설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의 책 '어린 왕자(Le Petit Prince)'와 만년필 한 자루를 테이블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는 "삶에는 우연이라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물려주다, 연결되다

    ―'어린 왕자'는 왜 들고 오셨나요.

    "몽블랑 CEO가 되고 가장 신경 쓴 작업 중 하나가 1924년 나온 몽블랑의 상징과도 같은 '마이스터스튁(Meisterstuck·명작이라는 뜻)' 펜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었어요. 이 오래된 펜에 어떤 얘기를 새로 입힐까 한창 고민하다 어느 순간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제가 할아버지에게 펜을 물려받았듯, 세대가 바뀌어도 계속 읽히는 대표적 문학 유산 중 하나니까요."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집필할 때 2차 세계대전을 피해 잠시 미국에 와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국 땅을 그리워하면서 뉴욕에서 애써 희망에 대한 얘기를 책으로 썼다. "쓴다는 건 그런 겁니다. 삶의 고난을 넘어서는 거죠."

    몽블랑은 4월 4일 밤 미국 뉴욕 원 월드 전망대 102층 꼭대기에서 새롭게 바꾼 '마이스터스튁 르 쁘띠 프린스' 펜을 처음 공개했다. 소설 '어린 왕자'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제품이다. 본래 검은색이었던 펜은 어린 왕자가 바라보던 밤하늘처럼 깊고 푸른 빛깔로 바뀌었고, 펜 뚜껑엔 여우 얼굴 패턴과 금빛 별 장식이 내려앉았다. 널리 알려진 소설 속 문장, '내게 있어 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해(Tu seras pour moi unique au monde)'도 만년필 윗부분에 새겨졌다.

    바레츠키는 "우리는 무언가를 기록하고 그것을 물려주는 일에 집중해 온 회사다. 한창 새롭게 뜨는 디자이너나 유명 회사와 손잡고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게 대세라지만, 우리는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물려주는 일, 전달하는 일, 연결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무엇과 연결한다는 건가요.

    "과거와 현재,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자, 1924년에 나온 오래된 펜과 지금 새것,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 1943년 미국 뉴욕에서 소설을 쓰던 생텍쥐페리와 2018년을 사는 우리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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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일 미국 뉴욕서 열린 ‘르 쁘띠 프린스’ 행사에서 배우 휴 잭맨(왼쪽), 가수 리타 오라(가운데)와 나란히 선 몽블랑 CEO 바레츠키./ 몽블랑

    ―연결하려면 끈이 필요할 텐데요.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죠. 생텍쥐페리가 그때 글을 쓰지 않았다면 우리와 연결될 수 없었겠죠. 매 순간 기록하고 남기고 간직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몽블랑은 이번에 새 펜을 내놓으면서 뉴욕 한복판에 있는 모건 도서관에 생텍쥐페리와 관련된 작은 전시도 함께 열었다. 미국인 아티스트이자 유명 전시기획자였던 조셉 코넬(1903~1972)은 뉴욕에서 '어린 왕자'를 집필하던 생텍쥐페리와 우연히 만나고는 그에게 홀딱 맘을 빼앗겼다. 이후 그는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완성하기까지 뉴욕에 남겼던 모든 흔적을 빠짐없이 모았다.

    생텍쥐페리가 그린 여러 장의 펜화, '어린 왕자'가 처음 출간되고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신문 서평은 물론이고, 생텍쥐페리가 까먹은 초콜릿의 포장지부터 그와 함께 술을 마셨던 바의 냅킨, 함께 탔던 기차표, 그가 살던 집 앞뜰에 떨어진 낙엽까지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 강박에 가까운 코넬의 수집벽을 주변 사람들은 종종 이해하지 못했다. 모건 도서관 전시는 바로 이런 코넬의 수집품을 소개하는 자리다.

    관람객들은 오래된 초콜릿 포장지, 낡은 우표, 생텍쥐페리 사인이 남겨진 오래된 잉크 상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갔다. 바레츠키는 "생텍쥐페리는 미국에서 '어린 왕자'가 출간되자마자 2차 대전 전투에 군용기 조종사 참전을 자원했고 전쟁이 끝나기 직전 행방불명됐다.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비극이다. 그러나 그가 실종되고 난 뒤 그의 고국 프랑스에서도 '어린 왕자'가 출간됐다. 우리는 지금도 그의 기록을 읽으며 어린 왕자를 만난다. 어떤 기록은 그렇게 고통을 희망으로, 불행을 축복으로 바꾸기도 한다"고 했다.

    쓰고 기억하는 삶

    바레츠키는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한 이후 줄곧 럭셔리 업계에서 일했다. 1994년부터 까르띠에에서 8년간 마케팅·관리를 했고 2002년엔 스위스 시계 회사 예거 르쿨트르에서 인터내셔널 세일즈 부문장으로 12년을 일했다. 2013년 몽블랑으로 옮겨와 세일즈 부사장을 했고 작년에 CEO가 됐다. 바레츠키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값비싼 제품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가치를 전승하는 회사에 끌린다"고 했다.

    "몽블랑은 제게 그런 점에서 특별합니다. 단순히 고가품을 파는 회사가 아니니까요. 디지털의 파도가 세상을 덮쳐 온다 해도 사람은 결국 손으로 무언가를 쓰고 그것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존재예요. 우리는 그걸 알리는 일을 하는 거죠."

    ―손 글씨는 그럼 얼마나 쓰십니까.

    "온종일요(웃음). 되도록 많은 것을 적어놓는 습관이 있어요. 적어놓으면 기억하게 되고, 기억해내면 거기에 반응하게 되죠. 쓰지 않아서 놓치는 것들을 생각하면 종종 아득합니다.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며 사는 것과 하루를 붙잡고 기록하면서 사는 삶은 분명 달라요."

    ―늙고 퇴화된다 해도 쓰고 있을까요.

    바레츠키는 싱긋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시간에 지지 않는 비법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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