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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결혼이 체질인 사람이 어디있나

      입력 : 2018.03.09 04:00

      [삶의 한가운데]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홍여사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습니다. 그리고 일단 다리를 뻗고 나면, 몸을 오그려 자리를 만들어준 옆 사람에게 더 이상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턱대고 자리부터 만들어주고 나중에 감사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되겠습니다. 불편한 자세로 참고 있어봐야 다리에 쥐만 날 뿐….

      홍여사 드림


      누가 가족에 대해 묻는다면 저는 참으로 잡다한 많은 것들을 쉼 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저에게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불행한 사람들보다는 행복하고, 행복한 사람들보다는 불행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이만하면 감사한다고 말하는 편이 행복에 한걸음 가까워지는 길이겠죠.

      그러나 남편은 저와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사는 게 우울하다, 아무런 낙이 없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삽니다. 가만 보면 남편은 항상 위를 올려다봅니다. TV나 인터넷 공간에서 접하는 럭셔리한 인생들을 과하게 부러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합니다. 물론 부러움이 강한 성취 동기가 되는 수도 있겠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얘기라면 저도 환영입니다. 저도 넓은 아파트 살며 고급 승용차 타는 사람들이 부럽고, 돈 걱정 없이 자녀교육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긴 하거든요.

      하지만 남편의 부러움은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언제나 화려한 싱글들입니다. 나이를 잊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트렌디한 싱글 중년들, 혹은 사표 쓰고 세계여행 다니는 '욜로'족 남녀입니다. 그런 사람들 흉내를 내기 위해 쓴 돈도 상당합니다. 그랬으면 기분이라도 좋아져야 할 텐데 그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감질이 나서 괴로운 모양입니다.

      그런 남편을 보며 저도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즐거움이 우선이라는 게 서운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남편의 푸념을 일상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내가 만일 싱글이었다면, 애들만 없었다면, 네 식구의 가장만 아니라면…. 그랬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울적한 기분이 사무치는 날엔 애꿎은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저와 제 살림살이를 쳐다보기도 하죠.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일러스트
      일러스트=안병현
      가정 내에도 갑을 관계가 있다면 우리 집은 남편이 갑입니다. 권력이나 돈에 상관없이 감정이 '갑'인 사람도 있나 봅니다. 밖에서는 그런 갑질이 통하지 않겠지만 가족만큼은 그 사람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더군요. 저와 아이들은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눈치를 보며 삽니다. 한 남자의 인생에 족쇄를 걸었다는 누명을 쓰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결혼으로 인생이 우울해진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그 결혼을 하자고 덤빈 건 본인이었습니다. 지금도 자신만 희생하는 듯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15년간 저도 쉬지 않고 벌었고, 책임감에 짓눌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나마 남편은 자기 취미 생활도 유지하고,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개인적인 부분을 악착같이 지켜왔죠. 그에 비하면 저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습니다. 저는 그냥 커다란 블랙홀같이 살아왔습니다. 뭐든 가족들한테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훅 빨아들이고 가족들이 요구하는 것을 쑥 뽑아내는…. 그런데 부모라면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요? 그나마 착하게 자라나는 아이들, 비싼 학원 안 보내도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 감사하며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는 차츰 무관심해지는 거 아닌가요?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남편한테 몇 번이나 당부했었습니다. 당신이 힘든 건 알겠는데, 나도 힘들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 조금씩만 참자. 특히 아이들 앞에서 살기 싫다는 소리 좀 하지 말아달라. 그럴 때마다 남편은 입꼬리를 묘하게 비틀며 대답하더군요. "당신은 이해 못해. 왜냐하면 당신은 결혼이 체질에 딱인 사람이니까."

      결혼이 체질에 딱인 사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묘하게 나빠지더군요. 결혼이 체질인 여자라서 고맙고 다행이라는 소리로는 안 들렸습니다. 뭔가 얕잡아 보는 느낌이고, 저에게 어떤 틀을 덧씌우는 것 같았죠. 그래서 며칠 전에는 제가 말꼬리를 딱 잡고 한번 물어봤습니다. 결혼에 딱 맞는 체질이 어떤 체질인데?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감각이 둔하고 생각이 단순한 체질? 하여간 축복받은 체질이지."

      남편의 그 말은 지금까지도 제 귓전에 쟁쟁 울립니다. 욕설도 폭언도 아닌데 저한테는 왜 그렇게 아팠을까요? 머리에서 심장으로 전기가 흐르는 느낌이더니, 곧 얼굴로 피가 몰리더군요. 남편 말인즉, 저는 자아도 없고, 고뇌도 없고, 취향마저 없는 행복한 아메바 같은 존재란 거잖아요. 그러면 아픈 아이 업고 밤을 새우는 건 체력 단련이고, 수시로 시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는 건 생활의 활력소이며, 몇 년째 같은 옷으로 버티고 있는 건 나름의 고집스러운 스타일이겠네요. 명품백이 싫어서 피해 다니고, 집이 좋아 종종걸음 쳐 귀가하고, 엉덩이가 가벼워 TV 보고 누워 있지를 못하는 거고요. 반면 본인은 감각이 예민해서 갖고 싶은 게 그렇게 많고, 열정이 넘쳐서 충동구매를 저지르는 건가요? 집에서 볼펜 하나도 스스로 못 찾는 건 머릿속에 고뇌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고, 쉽게 지치고 벌컥벌컥 화를 잘 내는 건 감성이 풍부해서 그런 거고요. 할 말이 제 가슴속에 차고 넘쳤습니다. 하지만 어느 하나 또렷한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더군요. 다만 남편이 던진 말을 고대로 되쏘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각이 둔하고 생각이 단순한 건 당신이야. 그리고 그런 사람은 진짜 결혼에 안 맞아. 그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정말이지 후회가 됩니다.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 객관적인 시각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을 배우자로 고른 것도 후회되지만, 그보다는 15년간 제가 살아온 방식이 더 유감스럽습니다. 어쩌면 남편을 정서적인 '갑'의 존재로 만든 건 저의 타고난 '을'의 정신이 아니었나 싶어서요. 참아주고 받아주다 보면 언젠가는 '갑'의 인정과 감사가 있을 걸로 믿는 '을'의 마인드. 제가 또 제 탓을 하고 있나요?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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