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충무로가 찜했다, '독립영화계의 송강호'

2010년 박정민이 영화 '파수꾼'에 나왔을 때 평단에선 "물건이다"라고 했다. 황정민은 전화를 걸어 "얼굴 보자"고 했고, 이준익 감독은 "독립영화계 송강호네"라고 했다.
최근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는 악보도 보지 않고 쇼팽·차이콥스키를 쳐내는 자폐증 환자 '진태'를 맡았고 지난 31일 관객 210만명을 넘겼다.

    입력 : 2018.02.02 04:00 | 수정 : 2018.02.02 11:08

    배우 박정민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자폐증 환자로 열연

    "하아…, 넌 연기가 과하다. 맡기면 안 되겠어(웃음)." 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영화과 과방에서 스무 살 박정민이 '아는 누나'에게 들었던 말이다. 대사 읊을 때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했다. 박정민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도 연기하고 싶은데, 어케 안 될까요?" '누나'는 한숨을 쉬며 "그럼 대사 하나도 없는 역할 줄게" 했다. 이 누나가 전주국제영화제·탐페레 국제단편영화제 등에서 상 받은 남궁선(38) 감독이고, 이때 박정민이 출연했던 영화가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세상의 끝'이다. 지난 2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만난 박정민은 당시를 떠올리며 부끄러운 듯 얼굴을 문질렀다. "연기를 못하니까 대사 한마디 없는 역할을 맡겼던 건데 그 영화가 뜻밖에도 잘 된 거죠. 군대 다녀오고 났더니 그 영화가 제법 유명해져 있었고요. 그 영화 보고 윤성현 감독님이 제게 '오디션 한 번 보러 오라'고 연락했는데, 막상 제 연기를 보고는 크게 실망했었죠(웃음)!"

    “저처럼 사진 못 찍는 배우도 없는데, 어떡하죠?”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스튜디오에 들어선 그는 머쓱한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웬걸, 한 컷, 두 컷…, 표정이 계속 바뀌는 걸 보며 사진기자가 한마디 했다. “배우는 배우네요.”
    “저처럼 사진 못 찍는 배우도 없는데, 어떡하죠?”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스튜디오에 들어선 그는 머쓱한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웬걸, 한 컷, 두 컷…, 표정이 계속 바뀌는 걸 보며 사진기자가 한마디 했다. “배우는 배우네요.”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연기하면 안 되겠다'던 이 청년, 어느덧 충무로 대세(大勢)다. 2010년 박정민이 영화 '파수꾼'에 나왔을 때 영화 관계자와 평단에선 "물건이 나타났다"고 했다. 배우 황정민은 바로 전화를 걸어 "얼굴 좀 보자"고 했고, 이준익 감독은 "저 친구 독립영화계 송강호네"라고 했다. 박정민은 차근차근 계단을 밟는다. '전설의 주먹'(2012) '들개'(2013) '동주'(2015) 등에 출연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왔고, 최근 '그것만이 내 세상'(최성현 감독)에서는 악보도 보지 않고 쇼팽·차이콥스키를 쳐내는 자폐증 환자 '진태'를 맡았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개봉 이후 예매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 31일 관객 210만명을 넘겼다.

    1등 영화 나오는 '독립영화계 송강호'

    ―영화 끝나고도 진태 얼굴이 아른아른하던 걸요.

    "시나리오가 워낙 좋아요. 처음 읽자마자 '어디서 많이 봤던 얘기인데 참 다르게 읽힌다' 했어요. 이병헌 선배가 캐스팅됐다는 말을 듣고 '이 영화 의외로 신선하겠다' 했고요. 제가 성격이 워낙 건조해요. 신파엔 잘 맞지 않죠. 근데 이병헌 선배나 윤여정 선생님이나 좋은 의미로 연기를 드라이하게 하는 분들이잖아요. 굳이 터트리지 않고도 감정을 그려낼 줄 아시죠. 이분들 사이에 잘 앉아만 있어도 덕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실제로 그랬고요."

    ―이 영화 찍기 전엔 피아노를 한 번도 쳐본 적 없다죠.

    "네. 감독님이 '네가 피아노를 다 쳐야 해'라고 하셨는데, 감독님도 피아노를 모르고 저도 전혀 몰랐던 거죠. 감독님도 막연하게 '할 수 있겠지' 했고, 저도 쳐본 적이 없으니 '뭐 하면 되겠지' 했는데, 웬걸요. 막상 시작해보니 보통 일이 아녔던 거죠. 촬영 전 3개월, 촬영 들어가면서 3개월 연습했지만 그것 가지고 되겠어요? 제가 성격상 타협을 잘하거나 포기를 잘하는 편이 아닌데, 이건 그래도 포기가 빨랐어요. '정확하게 칠 수는 없다. 정확하게 칠 필요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그때부터 겨우 흉내는 내게 된 거죠. 가령 제가 쳤던 차이콥스키 곡은 건반을 한 번에 8개를 누르거든요. 이때 오른손 두 개, 왼손 두 개는 포기했죠(웃음). '위치만이라도 정확히 짚어내자'고 생각했어요."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모습을 표현하는 건 어땠나요.

    "이 영화가 코미디잖아요. 자칫하면 장르 특성상 장애가 있는 주인공이 우스워 보일 수가 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죠. 딱 그 직전까지만 연기하는 것, 선을 넘지 않는 것, 그 부분이 어렵더라고요. 동시에 진태의 사랑스러운 면모를 그려내는 것이 또 어려웠고요."

    이미지 크게보기
    박정민이 자폐증 환자로 나오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JK필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건 선을 뛰어넘지 않고, 딱 어느 직전까지만 연기했죠.

    "맞아요.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 그래요. 워낙 말 못하고 감정 표현도 거의 안 하고 살죠. 아빠를 지독히도 닮아서 제가 이렇죠(웃음)."

    박정민은 충북 충주 출신이다. 공부를 무척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아버지는 과묵하고 보수적인 전형적인 충주 남자이고, 어머니 역시 말수가 많지 않다고 했다. 영화라는 꿈을 꾸게 된 건 중학교 3학년 때다. 강원도 갔다가 배우 박원상과 마주쳤다. 이 '아저씨'가 영화배우이고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나온다는 걸 알고 몰래 극장 가서 영화를 찾아봤다. 맘을 온통 빼앗겼다. 충남 공주 명문 한일고등학교에 가서도 내내 영화 생각을 했다. 멀쩡하게 공부하던 아들이 영화 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제대로 못 쉬었고 어머니는 머리를 싸맸다. 박정민 고집은 그래도 못 꺾었다. 2005년 고려대 인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2006년 한예종에 입학했다. 박정민은 "고등학교 땐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했다. 근데 영 잘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뭘 잘못했다는 거죠?

    "뭔가 뭔지도 모르고 책만 들입다 읽었으니까요. 윤성현 감독님 안 만났으면 지금껏 헤매고 있었겠죠."

    영화 '파수꾼'에 박정민을 캐스팅한 윤성현(36) 감독은 박정민이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수다 떠는 모습과 그가 대본 리딩하는 모습을 전부 몰래 촬영해놨다가 박정민에게 보여줬다고 했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연기할 때 모습이 너무 어색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윤 감독은 "그러니까 제발 저렇게 평소대로 움직이고 말해봐" 했다.

    ―연기하는 법을 이때 알았겠군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죠. 환자가 수술받고 멀쩡해지듯 그 이후로는 제가 봐도 참 많이 나아졌고요(웃음)."

    이미지 크게보기
    독립운동가 송몽규를 연기한 영화 ‘동주/루스이소니도스

    날 키운 8할의 열등감

    박정민은 2016년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을 냈다. 책에서 박정민은 종종 부끄러워한다. 연기 좋아하는 스스로를 대견해 하다가도 '이것밖에 할 줄 모르는' 자신을 민망해한다. 박정민은 "지금껏 열등감 덕에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영화 '동주'에선 시 쓰는 윤동주 친구이자 적극적인 독립운동가 송몽규를 연기했죠. 그런데 진짜 성격은 윤동주에 가깝나 봐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웃음). 지금껏 들키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남들이 저 연기하는 것을 두고 '잘한다'고 해줄 때마다 속으로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있어요. '지금 속고 있는 건데….' 전 끼도 없고 어릴 때 공부만 했고 지극히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죠. 영화가 참 좋아서 여기까지 왔지만, 막상 영화판 와보니 저 같은 사람은 안 맞는 곳이구나 싶기도 한 거죠. 매일 이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버둥거려요. 언젠간 들통나겠지만 그 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어서 날마다 벽에 머리를 찧는 거죠(웃음)."

    ―요즘 '변산'(이준익 감독)에 '사바하'(장재현 감독)에 '사냥의 시간'(윤성현 감독)까지 찍고 있죠.

    "모두 제가 정말 하고 싶어서 시작한 작품인데 여러 개를 하다 보니 체력이 안 따라줘서 힘들기도 해요. 성격이 대충 넘어가는 걸 잘 못하니 집에선 매일 잠 못 자고 머리 싸매며 괴로워하고요. '내일은 어떻게 해야 안 들키나'하고. 한때는 너무 지쳐서 술만 먹은 적도 있었는데, 요즘 고비를 겨우 넘겼고 이제 또 적응 중이죠. 어찌 됐건 앞으로 가는 거죠."

    ―도망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때론 그러고 싶죠." 박정민은 피식 웃더니 다시 정색을 했다. "그치만 다음에요. 숙제는 그래도 일단 다 해놓고 도망가야죠(웃음)."

    박정민 프로필

    1987 충북 충주 출생
    2005 고려대 인문학부 중퇴
    2006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입학
    2007 영화 ‘세상의 끝’으로 데뷔
    2010 영화 ‘파수꾼’ 출연
    2015 영화 ‘동주’ 출연
    2016 tvN 드라마 ‘안투라지’ 출연,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