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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주의 등짝에 '유머 스매싱'

불만에 찬 굳은 표정에 무언가 심통 맞고, 경직된 자세 천지… '겨울 왕국'은 한국인을 염두에 두고 만든 말인지도 모른다.
호주 오픈 4강에 오른 테니스 스타 정현의 흥 넘치는 인터뷰 덕분에 한국이 최근 새롭게 '유머'라는 옷을 입게 됐다. 정현을 필두로 달라진 한국의 유머를 살펴봤다.

    입력 : 2018.02.02 04:00 | 수정 : 2018.02.02 17:19

    [유머의 힘]
    [Cover story] 정현, 호주 오픈서 흥 넘치는 인터뷰로 세계 주목… 안 웃고 못 웃겼던 한국인, 유머 감각에 눈뜨다

    '겨울 왕국'은 한국인을 염두에 두고 만든 말인지도 모른다. 유머를 즐길 줄 모르고 웃음에 인색하기 때문이다. 불만에 찬 굳은 표정에 무언가 심통 맞고, 경직된 자세 천지다. 이는 숫자로도 증명된다. 여론조사전문기관 엠브레인 트렌드 모니터가 지난 2016년 전국 만 19~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 사람 2명 중 1명이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답했다. 젊은 세대일수록 감정 표현에 능할 것 같지만 오히려 20대의 50%가 '감정을 되도록 숨기는 게 좋다'고 답했다. 50대는 35%로 조사됐다.

    /일러스트=안병현

    유머를 바라보는 시각도 냉정하다. 그동안 유행했던 유머의 작명도 차갑기 짝이 없다. '썰렁개그' '허무개그' '사오정 시리즈'…. 배꼽 빠지게 크게 웃는 게 아니라 찬물을 끼얹은 듯 좌중을 조용하게 만드는 게 유머였다. 근엄과 위엄이 높은 가치를 지니고 가볍게 웃고 넘기는 건 말 그대로 '경시'된다. 무시하고 깔본다고 것으로 이어진다. "어디 누구 앞에서 농담질이야" "감히 내 앞에서 웃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수 있다.

    문화연구가 조승연씨는 "엄숙함을 강조하는 동아시아 문화에선 웃음을 유발하는 행위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언어적 신호로 읽히기 십상"이라며 "서구권에 비해 유머에 대한 가치가 굉장히 낮게 책정돼 있다"고 말했다. 문화연구가들 사이에선 한국이 유일하게 잘 구사하는 스탠드 업 코미디가 '건배사'라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나온다. 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speech writer)였던 존 로비트(Rovett)가 백악관을 떠난 뒤 곧바로 미 NBC 방송 시트콤을 집필했다거나, 레이건 대통령 이래 3명의 대통령 연설문을 담당했던 랜던 파빈(Parvin)이 유명한 코미디 작가인 걸 염두에 두면 한국의 유머 경직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웃기지 못하고 웃지 않는 문화는 언어 이미지도 딱딱하게 만들었다. 텍사스 A&M 대학 조츠나 바이드 교수 등이 2008년 집필한 '멘털 렉시콘(mental lexicon·심상 어휘)'이란 논문을 보면 한국어·영어 모두를 이해하는 유럽계 미국인, 한국계 미국인,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감정 반응 실험에서 영어로 문장이 주어졌을 때는 사람들이 즐거워했던 반면 한국어인 경우 실험자들이 좀 더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음장 같던 한국이 최근 새롭게 '유머'라는 옷을 입게 됐다. 인식 변화에 기폭제가 된 것이 최근 호주 오픈 4강에 오른 테니스 스타 정현의 흥 넘치는 인터뷰다. 유머를 보는 한국 사람도, 한국의 유머를 보는 외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졌다. 정현을 필두로 달라진 한국의 유머를 살펴봤다.

    명사들의 말말말
    /그래픽= 김의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확대된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는 유머의 시대다. 정치나 경제 분야는 물론 부부생활에서도 유머의 가치는 재조명받고 있다. "유머 감각이라는 건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현명하게 사는 지름길"(경제전문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 "유머를 즐기는 종업원이 많을수록 회사가 성공한다"(미 포브스지), "유머를 즐기는 사람들이 무표정한 사람보다 더 똑똑하다"(미 대화전문 매거진 컨버세이션), "정치에서 유머는 대단한 위장술(smokescreen)일 수 있다"(미 보스턴 글로브지)…. 구글에서 최근 '유머'를 다룬 기사들을 검색하면 하나같이 유머의 긍정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불안하고 복잡한 시대일수록 유머의 미덕은 돋보인다.

    유머와 웃음의 가치에 대한 이론도 다양하다. 플라톤은 '인간은 다른 이의 불행에 웃는다'는 우월성 이론(superiority theory)을 주장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완화 이론(relief theory)'을 내놓았다. 인간 내면에 억압된 성적 욕망과 폭력적 생각에 갇혀 있던 정신적 에너지가 유머를 통해 분출된다는 것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앙리 베르그송은 저서 '웃음'을 통해 "경직을 유연함으로 교정하고, 개체를 전체에 재적응시키며, 모난 것을 제거해 둥글게 하는 것"이라며 웃음에 대해 파고들었다. 결국 유머란 닫혀 있던 감정을 폭발해내는 탈출구이자 정신적인 안정제인 셈이다.

    해학 넘치던 한국, 유머는 어디로

    한국도 분명 유머러스한 시절이 있었다. 풍자와 해학은 전통 마당극이나 판소리소설의 핵심축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정치나 사회 풍자 유머는 공중파 채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보통사람'을 내걸고 자신을 유머에 써도 된다고 '공식' 인증했고,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아예 대통령이 스스로 유머 속으로 뛰어들었다. 1993년에 나온 정치개그집 'YS는 못 말려'는 1주일 만에 10만부가 팔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2000년 전후엔 '사오정 시리즈'가 유행했다. 세기말 불안했던 심리를 바탕으로 기성 권위에 대한 조소와 세대 간 단절을 반영한 유머였다. '만득이' '최불암' 시리즈도 비슷한 유였다. 유머는 세상에 대한 시민의 분노를 어루만지는 처방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유머는 푸대접받고 있다. 1990년대 인기를 끈 '썰렁개그'의 연장선상이라는 '아재개그'는 불쌍한 중년 남성을 위로하고 떨어진 권위를 그나마 세워주는 조소에 가깝다. 공중파에서 개그 프로그램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웃찾사' '코빅' 등을 담당한 김수미 작가는 "개그라는 건 시원하게 '까고', 독하게 '질러줘야' 맛인데 누가 강요한 건 아니지만 우리끼리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고 말해왔다"며 "국민 공감대를 아우르면서 불편해하지 않은 선을 맞춰야 해서 대중에 맞는 코드를 잡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미 드라마 '스타트렉' 시리즈 메인 작가로 활동하는 김보연씨는 "미국에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창작(creative writing) 수업을 필수로 두면서 유머 사용을 생활화하는데 한국에서 강조하는 작문은 입시용 논술 정도다. 유머보다는 논리력이 우선이다"고 했다.

    유머를 장악하면 모든 것을 장악한다!

    엘리자베스 2세

    각종 연구에서 유머는 더 나은 상대를 고르기 위한 '짝짓기'의 필수 요소로 꼽힌다. '스펜트(spent)'의 저자인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는 유머와 웃음이 '성(性) 선택'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유전적으로 더 나은 상대를 고르기 위해 본능적으로 유머에 더 끌린다는 설명이다. 미 '컨버세이션' 매거진은 "진화심리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사회에서 분쟁을 줄이고 자존감을 높이면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데 유머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유머러스한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재개그'에서 보듯 한국 중년 남성들은 '한 수 위' 유머감각을 뽐내기보다는 조롱의 대상에 놓이곤 한다. 시대 흐름에 뒤처진 중년 남성을 풍자하는 데서 아재개그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대화법' 강의를 해온 윤영미 아나운서는 "가장 호응이 없고 가장 웃음에 인색한 대상자의 키워드를 뽑으면 '성공한 중년 CEO'"라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품위 없다고 느끼고 자신이 사회에 바친 인생에 대한 보상심리가 강해 상대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얼굴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걸 커뮤니케이션에선 '바탕표정'이라 부르는데 중년 남성들의 표정이 가장 획일화돼 있다고 한다.

    김수미 작가는 "유머는 보통 자기를 내려놓고 스스로를 희화시키는 데서 많은 점수를 받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선 상대를 하대하고 끌어내리는 게 발달해 거부감과 상처를 주곤 했다"며 "권위주의가 강하고 긴 호흡의 개그에 인색해진 우리나라에서 개그맨은 더욱더 자신을 괴롭히고 망가뜨려야 겨우 살아남게 됐다"고 말했다.

    유머를 어떻게 쓰느냐가 리더십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회장'이 주는 권위주의 대신 친근한 유머로 소셜미디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박용만 두산 인프라코어 회장은 "내가 웃기면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게 된다. 그들을 마주 보면서 결국 내가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유머는 시대, 인종, 문화뿐만 아니라 개별적 수준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사람들의 유머를 배우고 그것을 정말로 장악한다면, 거의 모든 것을 장악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당한 '정현 세대', 유머의 결을 바꾸다

    문화연구가 조승연 작가는 "유머란 현재 처한 상황에서 자신을 객관화하고 한 발짝 떼어내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적(知的) 거리감의 표현"이라며 "부조리나 죽음도 쿨(cool)하게 받아들이는 블랙 유머를 수월하게 소화해내는 건 고차원의 정신적 유희"라고 한다. 결국 "유머는 자신감에서 온다"는 말이다.

    테니스 스타 정현의 화법이 인기 끄는 이유도 여유 있는 태도다. 정현의 등장은 지금껏 즐기던 유머의 결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승연 작가는 "정현뿐만 아니라 정현에 열광하는 팬들의 반응에서도 유머를 처세 기술이 아니라 유연한 태도로 즐기는 시대가 왔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디지털 세상에서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정현 세대'는 소셜 미디어나 영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데 강하고 다인종 문화에 전 세대보다 개방적이다. 진지함에 매몰되기보다는 가볍고 즉각적인 감각에 반응한다. 정현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이나 세련된 매너로 팬을 몰고 다니는 피아니스트 조성진 등이 이 세대에 포함된다.

    브랜딩 컨설턴트인 황부영 브랜다임앤파트너즈 대표는 "과거에는 젊은 세대들이 나서지 않는 게 미덕이었지만 요즘 세대는 '세상을 내 손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웃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여기서 나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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