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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가득 차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다

  • 유종인(시인·미술평론가)

    입력 : 2017.09.29 04:00

    [유종인의 영혼의 미술관] 화가 장욱진 '독'

    장욱진‘독’(1949년作)/서울옥션
    주인이 세상을 떠나니, 그의 항아리 독도 슬그머니 남의 눈독에 든다. 어머니의 독이었다. 거멀못으로 금이 간 곳을 때워 쓴 간장 항아리도 있고, 도공이 손가락 끝으로 휘휘 날리듯 난초를 몸에 그린 된장 항아리도 있다. 그런 항아리를 이웃 할머니가 "안 쓸 거면 나 달라"고 한다. 그 직설 앞에 내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어머니의 손 큰 너름새처럼 선선히 내주고 말았다. 장독대가 휑해지자 하늘이 거기 항아리 대신 앉았다.

    독(jar)을 보면 빈 것을 채워둔 것만 같다. 가득 찼을 때는 당연하고, 비워뒀을 때마저 독은 든든하다. 그게 독의 매력이다. 옹립(擁立)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들으면 독 항아리가 생각난다. 그 주변엔 배고프고 애잔한 식솔들이 풀 이슬처럼 매달려 있는 듯하다. 항아리는 그래서 묵묵한 사랑 같다. 비어 있어도 독은 으늑한 곳에 두는 든든한 믿음의 기명(器皿) 같다.

    독을 보면 허기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량이 생긴다. 화가 장욱진(1917 ~1990)의 대상들은 방일(放逸)한 듯 간명함 속에 놓임으로써 자유라는 것을 일상 속에 자처한다. 그의 독이 보여주는 단순함은 복잡한 구도나 다변(多辯)을 일거에 가만한 웃음으로 누른다. 속을 보여주지 않는데도 자꾸 무엇이든 꺼내고 뒤미처 넣어도 거리낌이 들지 않는다. 어머니 같다.

    독 뒤의 앙상한 나무는 독의 뒷배처럼 독을 과실과 열매로 채워줄 자신이 출중하고, 독 앞에 뒷짐 지듯 산책하는 까치는 그 독 곁을 걷는 것만으로도 기꺼운 복락(福樂)이다. 독을 채워주는 것과 독을 비워주는 것은 그런 면에서 하나다. 언젠가 독을 채워준 열매의 나무를 위해 까치는 그 나무의 외로운 가지에 마실을 가고 그 나무를 위해 농담과 수다의 노래를 번져줄 듯하다. 빈 겨울을 견디는 나무에게 까치는 싫증이 나지 않는 구설로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위로가 돼줄 것이다.

    독 항아리 뒤에 또 하나의 독이 있다. 그건 달이라는 독이다. 차고 기우는, 채우고 비워주는 요량으로 보면 달은 독의 원조(元祖)다. 장욱진의 경기도 덕소 시절(1963~1975) 찾아온 제자와 밤의 강가에서였다. 찰랑이며 흘러가는 여울 소리를 들으며 스승 장욱진은 제자에게 달을 가리켰다. "저게 진짜 달이지, 서울 달은 종이 달이야"라고 했단다. 실감으로 채워주고 실감으로 비워나가는 삶이 돌올하니 기껍다. 내 것을 비워 덜어주었을 때 오히려 그득해지고 뿌듯해지는 선량의 독 하나를 언제 마음의 장독대에 앉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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