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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 끝, '퇴준생' 시작

퇴사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수순이지만,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이제 한 번 이상 마주해야 할 숙명이 됐다.
취준생만큼이나 치밀하게 준비한 퇴준생에게 기회의 폭은 넓다.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새로운 기회를 위해 '퇴준생'이 된 이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입력 : 2017.09.08 04:00 | 수정 : 2017.09.08 07:17

    [Cover Story] 직장인의 또다른 이름 '퇴직준비생'
    갓 입사한 2030도, 은퇴 앞둔 5060도… "퇴사 준비는 '진짜 나'를 찾는 과정"

    오늘도 '취준생(취업 준비생)'들은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스펙' 쌓기에 매달린다. '취업 3종 세트'라 불리는 학벌, 학점, 토익 점수에 자격증, 어학연수 더한 '5종 세트'가 나오더니 얼마 전엔 공모전, 인턴, 봉사, 성형까지 더한 '9종 세트'까지 등장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고고익선(高高益善) 외치며 엄청난 시간과 돈을 쏟아붓고 있다. 오죽하면 '호모 스펙타쿠스(Homo-SPECtacus·취직 위해 끊임없이 스펙 올리는 사람)'란 말까지 나왔을까. 그러나 취직이란 결승선을 통과하면 펼쳐질 것만 같던 장밋빛 미래는 이내 잿빛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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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하는 시대는 지났다. ‘퇴사’는 이제 직장인 누구나 한 번 이상 마주하게 될 선택이며 숙명이다. 성공적인 퇴사와 새로운 시작을 위해선 취업 준비생만큼 치열한 준비와 각오가 필요하다. ‘퇴준생(퇴사준비생)’이 등장한 이유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래픽= 김의균 기자

    대형 건설 회사에 다니는 김재현(34·가명)씨는 한때 성공한 호모 스펙타쿠스였다. 사립 명문대 나와 고(高)스펙을 쌓아 부모님이 기대하는 대기업에 취직했다. 취준생 꼬리표를 보기 좋게 떼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청운의 꿈은 이내 무너졌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업무와 꽉 막힌 상명하달식 문화가 숨통을 죄어 왔다.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한 무의미한 프레젠테이션 수정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소모된다는 느낌이 커졌다.

    그사이 통장에 쌓인 월급보다 스트레스의 무게가 더 무거워졌다. 지금 그의 꿈은 '퇴사'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회사를 관뒀다가 후회하는 동료를 보며 '욱'하면 오히려 독(毒)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취업보다 퇴사가 어렵네요. 취직 준비엔 가이드라인이라도 있지 퇴사엔 정보도 답도 없으니까요." 김씨는 절박함에 취직을 준비하던 취준생의 마음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퇴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직장에선 비밀인 그의 또 다른 신분은 퇴사 준비생, '퇴준생'이다.

    김씨 같은 퇴준생들이 늘고 있다. 퇴사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퇴근 후 시간을 자기 계발에 투자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하기도 한다. IT 기업에 근무 중인 이우진(36)씨는 1년 후 창업을 목표로 퇴사 준비를 시작했다. 1년의 유예기간을 둔 건 사업에 필요한 노하우를 회사에서 더 경험하고 사업 밑천을 조금이라도 모으기 위해서다. 짬나는 대로 강연도 듣는다.

    퇴준생을 내세운 책도 등장했다. 여행 서적 '퇴사준비생의 도쿄'는 퇴사를 꿈꾸는 이들이 사업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여행이라는 콘셉트로 만든 책이다. 저자 이동진씨는 "퇴사 후 넓은 세상을 마주하기 위해선 취업준비생만큼이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퇴사준비생'이란 표현을 썼다"고 설명했다.

    퇴사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수순이지만,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이제 한 번 이상 마주해야 할 숙명(宿命)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갓 회사에 들어온 20대 직장인부터 정년 앞둔 60세 언저리 직장인까지 모두 '잠재적 퇴준생'이란 얘기다. 취준생만큼이나 치밀하게 준비한 퇴준생에게 기회의 폭은 넓기 마련이다.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새로운 기회를 위해 '퇴준생'이 된 이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일러스트
    일러스트=안병현

    돈보다 삶의 질, 성취감이 중요…이직 꿈꾸는 2030 ‘퇴준생’

    최근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등장한 퇴사의 유형은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반 사이 태어난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라 불리는 20~30대의 조기 퇴사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2016년 신입사원 채용실태 조사’에 따르면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은 27.7%였다. 좁은 취업문을 뚫고도 신입사원 4명 중 1명이 입사 후 1년 안에 회사를 떠난다는 얘기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신입사원의 근성, 인내심 부족을 지적하지만 조기 퇴사한 신입사원의 입장은 다르다.

    ‘돌취생(입사 후 돌아온 취업 준비생)’이 된 이지은(26)씨는 공기업 입사 후 10개월 만에 퇴사했다. 이씨는 “동기부여가 될 만한 조직의 리더나 업무 기회가 없었다”며 “버티는 것보단 내가 기회를 펼칠 수 있는 회사를 빨리 찾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구직자 2935명을 대상으로 ‘직장 선택의 기준’에 대해 설문한 결과 신입직은 근무시간 보장(24.8%)을 1순위로 꼽은 반면 경력직은 연봉 수준(24%)을 꼽았다. 젊은 세대에겐 돈보다 삶의 질이 더 중요한 가치임을 보여준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디지털 정보에 민감하고 자아실현의 욕구가 큰 밀레니얼 세대들은 커리어 관리에 철저하고 이직과 직무 이동 등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임금 수준과 복지 후생, 문화적 욕구를 모두 충족하는 좋은 일자리는 부족하기 때문에 퇴준생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두 번째 명함을 준비하는 신(新)중년 ‘퇴준생’

    본격적으로 은퇴에 접어든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수는 약 730만 명. 전체 인구의 14%를 차지한다. 50~60대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 도미노’는 퇴사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또 다른 축이다.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명함을 준비해야 하는 ‘5060 퇴준생’은 늘었지만 이들이 재취업할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이들 신(新)중년 퇴준생은 더욱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올 초 KB국민은행에서 희망 퇴직한 조광휘(54)씨는 퇴직 전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의 금융 특화 전직 지원 서비스를 활용해 ‘금융 전문 강사’라는 새로운 명함을 만들었다. 27년 6개월의 은행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재무, 노후 설계 등을 강의하게 됐다. 그는 “직장에서 강의라곤 해본 적 없는데 의외의 적성을 발견했다”고 했다. 취미로 윷놀이를 즐겨온 그는 탄력을 얻어 ‘윷놀이 전문 강사’라는 세 번째 명함까지 만들었다.

    권영규(62) 전 서울시 행정부시장은 최근 2년간 한국국제협력단(KOICA) 자문단원으로 파라과이에서 활동 후 돌아왔다. 그는 “퇴직 준비를 전혀 못한 채 일을 관뒀다가 3년을 허비했다”고 했다. 자문단 활동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꼈다는 그는 스페인어 공부를 하면서 또 다른 명함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5060 퇴준생들에게 “소위 잘나갈 때일수록 퇴사 이후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며 “겸허히 자신을 낮추는 자세도 필요하다” 조언했다.

    경력을 포기하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길을 찾는 퇴준생도 있다. 중소 건설 회사에서 지난해 퇴사한 정의철(57)씨는 공인중개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늘 고용 불안에 시달렸던 정씨는 40대 후반부터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준비했다. 퇴근 후 틈틈이 온라인 강의와 독학으로 3년 전 합격에 성공했다. 공인중개사무소를 열기 전까지 인턴을 자처하며 다른 사무소에서 일을 배운 그는 현재 온라인 마케팅을 배우고 있다.

    퇴준생 첫걸음, 나를 탐구하라


    ‘너무나 좋아해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몰두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면 젊은이들은 그것을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일로 삼는 프로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무취미의 권유’에 나오는 문장이다. 퇴준생이라면 반드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면 즐거운지, 무슨 일을 잘하는지 자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탐색의 시간이 필요하다.

    NGO에 다닌 김샛별(27)씨는 지난해 12월 회사를 관뒀다. 업무량이 많아 야근하다 막차 타고 집에 가는 일이 수두룩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취미로 시작한 ‘플라워 레슨’이 김씨의 인생을 바꿨다. 지난해 8월 플로리스트 준비 과정을 등록하면서 퇴사 준비를 시작했고, 넉 달 뒤 회사를 관뒀다. “좋아하는 일을 해서 행복하다”는 김씨는 현재 플로리스트 국가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고 있다.

    손성곤(40) 직장생활연구소 소장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직장인들 대부분이 취직 전이 아니라 퇴사를 앞두고서야 뒤늦게 진로 탐색의 과정을 거친다”고 말했다. 손 소장은 “퇴사를 위한 현실적인 준비를 하기 전에 왜 퇴사하려는지 자신부터 탐구하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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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퇴사 준비의 목표와 계획을 설정하라

    취업 준비와 달리 퇴사 준비는 정해진 방법이나 기간, 대상이 없다. 퇴준생 스스로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실천에 옮기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퇴준생 선배들은 무엇보다 ‘기간 설정’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퇴사 시점을 정하고 새 시작을 위한 ‘퇴준(퇴사준비) 자금’ 마련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조애진(36) 변호사는 대학 졸업 후 근로복지공단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여러 공기업 공채 시험에 응시해 가장 먼저 합격한 곳이었다. 어렵게 입사했지만 일에 큰 보람을 느끼지 못했고 조직 생활도 맞지 않았다. 입사한 지 5년 됐을 때 더 이상 비전이 안 보여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퇴사 준비 기간은 1년이었다. 퇴근 후 평일 저녁과 주말을 이용하며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조 변호사는 “5년의 회사 생활과 1년의 퇴사 준비 기간은 스스로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깨닫고,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비용과 마음을 준비하는 값진 시간이었다”고 했다.

    창업을 준비 중인 신수영(40)씨는 5년 전 퇴사를 고민하며 ‘무한도전’이라 이름 붙인 통장을 만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하든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매달 100만 원씩 모은 돈이 창업을 위한 종잣돈이 됐죠.” 내년 회사를 퇴사해 쇼핑몰을 열 계획이라는 신씨는 “돈 걱정이 없어지니 수월하게 퇴사 시기를 결정하고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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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잡코리아(구직자 2935명 대상)

    퇴사 준비하다 지금 일의 소중함 깨닫기도

    퇴사라는 목표 설정이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직장 생활에 활기를 주기도 한다. 지금 하는 일을 정리하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나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IT 기업에 근무하는 직장인 구혜정(35)씨는 적성에 맞지 않은 업무와 팀장과의 잦은 의견 충돌로 퇴사를 고민했다. 이직 경험이 한 번 있는 구씨는 퇴사에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퇴사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고 입사 3년 차가 되는 내년 3월을 ‘디데이’로 삼았다. “시간 날 때마다 인수인계서를 미리 써보기로 했어요. 팀장도 제 담당 업무를 100% 이해하지 못하는데 후임자에게 어떻게 업무를 인수인계해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디테일하게 정리가 되더라고요. 되레 내가 부족한 것을 알게 돼 보완했더니 팀장님 칭찬까지 받았어요.”

    ‘퇴사준비생의 도쿄’의 저자 이동진씨는 “퇴사 준비는 퇴사 이후의 삶은 물론 지금의 일을 가치 있게 할 수 있도록 도운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자기 계발”이라고 말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퇴사를 결심하고 10년의 퇴사 준비 과정을 거쳐 퇴사한 이나가키 에미코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저서 ‘퇴사하겠습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회사는 나를 만들어가는 곳이지 내가 의존해가는 곳이 아니다. 언젠가 회사를 졸업할 수 있는 ‘자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퇴준생의 시작은 자신을 찾는 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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