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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아늑한 아지트가 되어주었던 나의 놀이터…

  • 박철화·문학평론가

    입력 : 2017.08.25 04:00

    [박철화의 사소한 것의 인문학] 유년의 우주, 골목길

    고향에 가끔 간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특별히 시간을 낼 필요도 없이 휭하니 다녀오곤 한다. 오고가는 부담이 작아서인지 한번 가면 이런저런 일을 더 보고 올 때도 꽤 있다. 이번 여름엔 내가 태어난 동네에 가봤다. 어릴 때엔 도시 외곽의 한적하고 가난한 산동네에 불과했는데, 대학가에 발을 걸치며 꽤 번화한 곳으로 바뀌었다. 그것만 빼고는 다행스럽게도 동네는 예전 틀을 거의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도화리(桃花里)라 불린 그곳에 할아버지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덕에 우리 집은 동네 터줏대감이었다. 좋은 점도 많았지만, 불편한 점도 있었다. 늘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일요일 아침이면 여유 있게 늦잠을 자도 좋으련만, 새벽같이 일어나 동네를 쓸어야 했다. 그런데 억지로라도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집 앞을 쓸다 보면, 어느새 이웃들도 하나둘 나와서 서로 인사를 나누며 쓸기에 나섰다. 어느 집인가 사정이 있어 빠지면, 아버지는 일부러 가서 마저 쓸어주곤 했다. 그래서일까. 일요일 오전의 고즈넉한 시간 속에 싸리나무 빗자루가 지나간 흔적이 추상 무늬처럼 남아 있던 그 골목으로 사람들의 발자국이 하나 둘 찍히며 단정함이 지워지던 그 풍경이야말로 내 유년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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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골목길을 누비던 기억. 골목길에서 아이들은 미끄럼을 타고, 눈을 쓸고, 연탄재를 뿌리면서 공동체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연습을 했다. / 조선일보DB

    눈 치우기 역시 동네 사람들 몫이었다. 내 고향 춘천은 댐과 호수가 많아서인지 겨울에 폭설이 자주 내렸다. 그러면 다들 나와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눈을 치웠다. 일을 거들던 아이들은 그 와중에 조금의 경사라도 있으면 빙판길을 만들어 미끄럼을 타곤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빙판길에 타고 남은 연탄재를 깨서 뿌렸다. 유리처럼 맑은 가슴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미끄럼의 흥이 깨진 아이들은 놀잇감을 찾다가 양쪽으로 쌓아놓은 눈을 모아서 골목 한 귀퉁이 벽에다 대고 이글루를 만들곤 했다. 차가운 흙바닥을 엉금엉금 기어들어 가긴 해도 매서운 칼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아지트였다.

    요즘처럼 이웃끼리 단절된 시대가 아니었다. 김치를 담그든, 떡을 하든, 하다못해 장맛비 추적추적 오는 날 부침개를 부쳐도 이웃에 돌리던 때였다. 아이들은 열심히 이집 저집을 드나들었다. 때때로 무슨 공사라도 벌어지면 거기가 곧 놀이터였다. 어른들 일하는 요령을 곁눈질하기도 하고, 연장을 쥐어보기도 하며, 곁에서 돕는다고 나대다 일거리를 늘려 혼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얼굴 붉히지 않는 즐거운 잔치였다. 특히 김장철이 되면 항아리를 묻을 구덩이를 파야 했다. 대가족 제도여서 대개 팔뚝이 굵은 장정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뭔가 거들고 싶어 했다. 그게 곧 소년이 남자가 되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나도 형과 함께 단둘이서 김장독과 무를 묻을 구덩이 다섯 개를 파는 데 최초로 성공했던 날의 우쭐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다 남정네 없는 집이 있으면, 가서 흙구덩이 파는 노동을 기꺼이 자청하기도 했다. 소년이 청년이 되는 것이다.

    골목은 그래서 단순히 사람들이 오고가는 공간이 아니었다. 몸을 통해 세계에 참여하는 출발점이자, 타인들과 따듯한 관계를 맺으며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현장이었다. 길을 쓸고 눈을 치우던,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이웃들에게 먹을 것을 나르던 그 골목이야말로 노동과 축제가 뒤섞인 삶의 흥겨운 판이었던 것이다. 그 길은 또한 누군가 죽으면 동네사람 모두의 눈물 섞인 환송 속에 황천길을 떠나는 곳이자, 새로 용달트럭이 이삿짐을 부리면 손을 보태 보잘것없는 살림살이를 옮겨주기도 하던, 동네 한가운데 평상에 어른들이 나와 앉아 어린아이들을 다 같이 지켜보던 죽음과 삶의 장소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고향에서 올라오는 내내 나는 골목길 저쪽에서 울고 웃으며 장난치던 한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를 키운 건 태반이 바로 그 골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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