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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수묵화 濃淡처럼 짙어지는 메밀의 향

      입력 : 2017.07.21 04:00

      [정동현 셰프의 생각하는 식탁] 여름을 식힐 메밀국수

      간판 아래 벚꽃 나무가 서 있었다. 앙상한 가지 위로 분홍 벚꽃이 사탕 알처럼 달려 있었다. 일본 도쿄 롯폰기의 소바(메밀국수)집 '혼무라안(本むら庵)'이었다. 우리는 머리를 파랗게 민 남자의 안내를 받아 실내로 들어섰다.

      정장을 차려입고 상을 받는 중년 남자, 화려한 투피스 차림의 중년 여성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구석 한 테이블에는 파란 눈동자를 한 외국인이 한 일본인의 안내를 받으며 어설픈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그 테이블 말고도 여럿이 외국인 차지였다.

      여름을 식힐 메밀국수
      조선일보DB
      우리는 봄 햇살이 들이치는 창가에 앉아 상을 받았다. 노란 성게 알이 하얀 국수에 올라와 있었다. 메밀의 겉껍질을 벗기고 제분해 검지 않고 하얬다. 가격은 시가. 이 집에서 제일 인기 많은 메뉴라고 했다.

      성게 알을 옆으로 살짝 밀었다. 달달하고 간간한 쓰유와 간 무, 와사비(고추냉이)를 뿌려 면을 말았다. 밀어둔 성게 알을 면에 살짝 얹어 입에 넣었다.

      면의 거친 표면이 고양이 혓바닥 같았다. 마음을 쉽게 주지 않는 고양이의 드문 애교처럼 까끌까끌하지만 드문드문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면은 쫄깃하지 않았다. 대신 벚꽃이 툭툭 떨어지듯 입 안에서 무심히 분화(分化)했다.

      첫 맛은 무미(無味)했다. 어릴 적 쇠를 핥으면 나는 비리고 또 은근히 달달한 맛이 입에 돌았다. 그 첫맛 뒤로 구수한 향이 느껴졌다. 달달한 밀과는 다른 땅의 맛, 낙엽이 쌓이는 가을 오후 나절 같은 느긋한 향이었다. 그 향 위에 땅에서 자랐지만 정반대로 쓰고 달달하며 화한 무와 와사비를 섞으니 수묵화의 농담(濃淡) 같은 은근한 재미가 있었다.

      설탕을 바른 것처럼 달콤하고 버터를 녹인 듯 기름기가 도는 성게알을 더하니 나들이 화장을 한 것처럼 음식이 화려해졌다.

      일본에서 면 요리 중 이렇게 격식을 따지는 요리는 메밀국수, 즉 소바가 유일하다고 한다. 젊은 층은 라멘, 중장년층은 소바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에서 소바의 격을 따지며 먹자면 조선호텔 '스시조'에 가는 것이 맞는다. 여름 한철 진행하는 '라이브 소바'는 일본에서처럼 보는 앞에서 메밀면을 뽑아 준다. 숲의 향이 올라오는 히노키 나무로 짠 다찌에 앉아 하얀 소바를 먹으면 굳이 일본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격(格)이 아닌 한적하고 은일(隱逸)한 맛을 즐기고 싶다면 서울 서촌 '노부'에 간다. 젊은 여자 사장은 아침마다 맷돌로 메밀을 갈고 그 메밀가루로 밀과 8대2의 비율에 맞춰 면을 뽑는다. 그렇다 보니 자리가 좁고 음식이 금방 떨어질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불편을 감수하고 자리에 앉아 소바 한 그릇을 받으면 정갈한 기운이 그대로 느껴진다. 정(釘)으로 돌을 깨 만든 엄격한 격이 아니라 흙을 빚어 만든 유한 손길이 다가오는 듯했다. 차가운 쓰유에 찍어 먹는 자루소바와 뜨끈한 육수에 담겨 나오는 소바가 있는데 냉한 쪽이 더운 기운을 환기시켜 준다면 뜨거운 쪽은 그 더위에 맞서 싸우는 힘을 준다.

      압구정동 '스시시오'의 청어를 올린 따뜻한 니신소바(にしんそば)도 그 축이다. 스시 코스의 맨 마지막에 나와 속을 뜨겁게 훑고 지나가는 니신소바는 훈제(燻製)한 청어를 가쓰오부시(가다랑어) 국물에 함께 우려내 그 감칠맛이 진하다 못해 육중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나고 자란 탓에 더운 여름이 되면 허리를 곧추세우고 메밀면의 풍미를 음미하기보다 간 무를 잔뜩 넣고 희석한 와사비를 뿌린 뒤 고소한 김을 버무리듯 넣은 메밀국수가 당길 때가 잦다. 그 취향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한창 유행하던 고기 뷔페에 가면 메밀국수를 말아먹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때 고기를 몇 인분 먹고 거기에 메밀국수를 대여섯 그릇 말면 주인 아주머니는 "그래, 많이 먹어라, 많이"라고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서울에는 그런 메밀국숫집이 여럿이다. 그중 우동으로 유명한 을지로3가 '동경우동'은 여름 한정으로 메밀국수를 판다. 달달한 맛이 덜하고 대신 가쓰오부시의 훈연한 맛이 치밀하다.

      시청 일대 직장인들을 끌어모으는 '송옥'과 '유림면'도 메밀국수로 일가(一家)를 이룬 집이다. 모서리가 닳은 테이블에 흰 셔츠 자락을 말아 올린 직장인들과 말없이 면을 말아 먹는다.

      시청 바로 옆 동네인 광화문 '미진'은 이런 한국식 메밀국수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다른 곳과 상이한 것은 성인 남성이 다 먹기에도 벅찬 네 덩이의 메밀국수와 달고 짠 쓰유다.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간 무를 한 숟가락, 밥을 볶듯이 김을 한 젓가락 크게 넣어야 간이 얼추 맞다. 그리고 아낌없이 면을 푹 담갔다 입에 쏟아넣듯 집어넣는다.

      고소한 김과 시원한 무, 간간한 국물이 강원도 땅의 그 무던한 성품을 닮은 메밀면에 얽히고설켜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몸에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갈 길 바쁜 시간이 멈춘다. 한철 뜨거운 여름이 잠시 쉬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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