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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쓰고 달고 독특한 맛의 에스프레소, 내밀한 벗이 되었다

  • 박철화·문학평론가

    입력 : 2017.07.14 04:00

    [박철화의 사소한 것의 인문학] 커피와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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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프레소 한 잔. 카페인이 적고, 순수한 커피 맛을 느끼기에 좋다./픽사베이
    지난 주말 연이은 장마에 게릴라성 폭우까지 이어져 바깥 활동이 불편했다. 유럽의 맑고 투명한 햇살을 쬐다 돌아와서 그런지 자꾸 우울하고 처지는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느라 뒤적이는데, 일본 도쿄의 새로운 카페를 두루 다룬 책이 눈에 띄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데다 도쿄도 자주 가니까 한번 들러보라며 지인이 준 선물이었다. 별생각 없이 목차부터 몇 장 들춰보다가 꽤 오래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는 커피를 프랑스에서 배웠다. 1992년 프랑스 보르도 대학에 가면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알겠지만, 여기서 커피란 에스프레소를 말한다. 물론 그 전에도 커피를 마시기는 했다. 인스턴트커피가 그것이다. 내 고향 강원도 춘천에는 미군 부대가 있었고, 중앙시장 구석에 그 미군들에게서 나온 생활용품을 파는 보세 가게가 몇 있었다. 커피 마니아들은 당시에도 질 좋은 인스턴트커피를 거기서 사다가 향을 음미하며 마시곤 했다. 어쨌거나 나는 어려서 그런 쪽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끔 그 커피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험 기간이 그러했다. 문제는 평소에 친하지 않던 잠이 밤을 새우려고 커피를 마시기만 하면 예외 없이 찾아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대학에 오고서도 커피를 잘 마시지 않았다. 어쩌다 친구들과 어울려 한 잔 마시는 정도였다.

    보르도 대학에 가니 제일 흔한 음식이 고기였다. 정부 보조를 받는 학생식당은 밥값도 쌌다. 거의 매일 걸신들린 듯이 스테이크를 먹었다. 하도 먹어서 나중에는 의사로부터 3개월 육식 금지 처방까지 받았다. 지방간 소견이 보인다나 어쩐다나. 대학 내내 굶다시피 하다 갑작스레 육식에 빠져든 탓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고기를 먹다 보니 뒤끝이 늘 느끼했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는 당시 돈으로 500원 안팎이었다. 가난한 유학생이었지만 그 정도는 견딜 만했다. 아니 안 마실 수가 없었다. 서양 음식은 기름져서 반드시 마지막에 디저트와 음료가 당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 신분이니 제대로 된 디저트는 비싸서 먹을 수 없고, 커피로 대신해야만 했다.

    유럽에서 커피는 기본이 에스프레소고, 그 옆에 꼭 설탕이 나온다. 경우에 따라 초콜릿을 주는 곳도 많다. 에스프레소에 보통 사람들의 디저트 성격까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아하게 정교한 디저트로 마감할 시간도, 돈도 없는 사람들이 진한 커피에 설탕을 그득 넣어 마시면, 그게 곧 디저트이자 음료가 된다. 빨리 뽑고, 후딱 마시고! 늘 시간과 돈이 모자라 심신이 고단하던 유학 생활 내내 하루 두어 잔씩 마시는 에스프레소는 내밀한 벗이자 빠질 수 없는 영양제였다.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 주문받는 분들이 난처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물어왔다. "양이 아주 적고 맛이 쓴데 괜찮으시겠어요?" 항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더블로 달라! 어쨌거나 그랬던 우리가 불과 십수년 만에 유럽의 명품 커피머신을 혼수 목록에 넣을 정도의 변화를 겪었다. 심지어는 유럽과 다르게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지 않고 '식기 전에 원샷으로 마시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폭탄주 문화의 연장선에 있는 게 아닐까? 아마도. 그런데 사실 우리 음식은 맛이 강렬해서 부드러운 것으로는 뒷감당이 안 된다. 믹스커피가 유행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에스프레소의 쓰고 단 독특한 맛이야말로 빨리빨리를 외치며, 뜨겁고 강렬한 음식을 후딱 먹어 치우고 일해야 하는 우리 문화와 맞는 게 아닐까?

    이 글을 적고 있자니 장마도 끝물인 이번 주말 햇살이 비치는 카페에 나가 앉아 가난했던 유학 생활을 설탕 삼아서 정말 뜨겁고 쓰면서도 달콤한 에스프레소를 더블로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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